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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 낭자와 의상 대사의 전설
선묘 낭자와 의상 대사의 전설
  • 의사신문
  • 승인 2015.05.22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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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5〉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신라에서 30대 중반의 스님이 당나라로 공부하러 왔다. 지엄 대사 밑에서 10년 간 열심히 불교교리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을 얻은 후 산동 반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신라로 떠났다. 그때 한 여인이 스님에게 주려고 법복을 만들어 항구에 도착했으나 배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낙담한 그 여인은 망연자실하여 떠난 뱃길을 쳐다보다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도 간혹 볼 수 있는 종교인을 짝사랑한 여인의 애절한 이야기입니다. 스님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칠 스캔들입니다. 아마 교단의 조사를 받아야 할 겁니다. 우선 당나라에 유학 온 스님이 무슨 연유인지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10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으면 보통 여자가 그 오랜 기간 그 스님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또 단지 떠나는 임을 못 만나고 의복을 주지 못한 사정이 자신의 생명을 버릴 만큼 절망적인 것일까요? 아마 스님이 약간의 암시를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여인은 법복을 핑계 삼아 스님을 항구에서 만나고 신라로 쫓아가려는 속셈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종교의 벽에 막힌 두 남녀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순애보일 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에 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그 여인이 바다의 용이 되어 스님을 안전하게 신라로 귀국하게 하였답니다! 그 스님이 영주 산골에 절을 세우는데 산 도둑 수백 명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용이 된 그녀가 큰 바위를 들고 하늘에서 시위를 하자 모두 놀라 달아나서 그 자리에 큰 가람을 짓게 되었답니다!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고, 공을 기려 절 안에 그녀의 사당祠堂을 짓고 본전 부처님 상 밑에 물이 흐르는 땅을 골라 석룡石龍을 만들어 묻었습니다. 그 스님이 의상義湘 대사大師이고 여인이 선묘善妙 낭자娘子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신 바와 같이 이 스캔들은 무마되고 오히려 승화되어 아름다운 전설로 탈바꿈 했습니다. 불쌍한 그 여인은 해룡으로 신격화되고 우리나라 불교 전파에 혁혁한 공을 쌓은 셈이 되었습니다. 사당인 선묘각을 짓고 부처님 밑에 그녀를 뜻하는 석룡을 모신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파격입니다. 이렇게 선묘를 엄청나게 신격화하면 자연히 의상 대사도 같이 올라가겠지요.

 의상 스님은 지극히 현실주의자 인 것 같습니다. 형님으로 모시는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그 유명한 ‘동굴의 해골바가지’ 사건으로 원효는 깨달아 신라로 되돌아갔으나 의상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원효와 의상에게 당나라 유학은 선진불교를 배우는 목적이외에 서로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원효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의 길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의상에게는 해외유학 경력을 얻기 위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후 사상적 통합을 위해 새로운 종교이론이 필요했고 의상은 이에 부응하여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강조하는 화엄 사상을 들여왔습니다.

 영정에 그려진 의상 대사는 당당한 체구에 반듯한 이목구비의 미남자입니다. 의상이 당나라에 처음 도착하여 여독으로 병에 걸렸을 때 기거한 양주 성주城主의 딸이 선묘 낭자입니다. 선묘는 의상에게 반하여 자기 심정을 고백까지 하였으나 의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제자로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가끔 선묘가 공부하는 의상을 찾아왔다고 하고 떠나자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럼 누가 이러한 선묘의 신격화를 주도했을까요? 아마도 의상 대사의 암묵적인 지시 하에 제자들이 주동을 했을 것입니다. 의상은 귀국 후에 여러 사찰을 짓고 삼천 명의 제자를 양성하여 국가적 종교 지도자가 됩니다.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였던 선묘 낭자에게 애정이 있었고, 그 자살에 죄책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그녀를 전설로 재탄생 시키고, 이 이야기를 낙산사 대웅전에 벽화로 그려 영원히 남겨두었습니다.

 마지막 의문점으로 왜 의상대사가 먼저 떠나서 선묘가 만나지 못하였을까요? 그 당시 산동 반도에는 신라인이 많이 살아 신라방까지 있고 고국과 선박으로 왕복했으니 보통 상황에서는 놓치기 어렵겠지요. 혹시 의상이 선묘를 떼어놓기 위하여 일부러 예정보다 일찍 가지는 않았을까요? 의상으로서는 억울한 추측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반론으로 통일 신라를 침공하려는 당나라 고종의 의중을 문무왕에게 알려주려고 급히 귀국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에도 이 황당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화엄 사상을 소개하고 발전시켜 공로가 큰 대사님의 일이니 모르는 척 했겠지요. 진실한 삶을 추구하려 애쓰던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연에서 연민도 느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민심이 합의하고 묵인해 신격화 된 것이지요. 하여튼 의상은 국가의 스승이 되고 결과적으로 선묘 사건은 대사의 불성佛性을 나타내는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의상이 중국에서 전수받은 화엄종은 그 후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기본 개념 중 하나가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은 하늘도 신도 아닌 오직 사람의 마음으로 이루어진다”입니다. 선묘 낭자와 의상 대사의 여러 행적은 두 사람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구도자와 진솔한 사랑을 간직한 여인, 두 마음의 상호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물입니다. 또한 추문이 될 번한 의상과 선묘 사건을 애틋하고 아름다운 전설로 바꾼 것도 오직 사람의 마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후 천 사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 마음의 작용은 미묘하기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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