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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동쪽 〈2〉 
북촌의 동쪽 〈2〉 
  • 의사신문
  • 승인 2015.05.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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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36〉

청원산방 현판
재동초등학교를 돌아서면서 특별해 보이는 한옥들이 하나씩 나타납니다. 골목길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대문은 묵직하면서도 말끔합니다. 나타나는 한옥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서편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집들보다는 조금 더 커 보입니다.
 똑같아 보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대문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문 위쪽에 붙여 놓은 집의 이름이 간호 눈에 띕니다. 정촌학당, 청록재, 락고재, 청원산방, 공일당…현판마다 글씨체와 모양이 다 다릅니다.

 이곳엔 한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있습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안락함이 있는 한옥에서의 하룻밤이 오래 기억될 듯합니다.

 기품 있는 예서체의 현판만 보아서는 단순히 규모가 좀 큰 한옥이라 생각했습니다. 담은 진흙과 얇은 돌 판을 켜켜이 쌓아 올려 은은한 멋을 풍기고 있었고 대문은 세월의 무게를 입고 묵직하게 닫혀 있었습니다. 예서로 쓴 당호 `樂古齋' 역시 가볍지 않습니다. 4개의 객실을 운영하는 이 게스트하우스의 대문과 벽을 살피다 문득 보니 이곳이 `진단학회 요 창립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이 일인학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며 일본의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 구성에 이용되곤 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 의한 추사 김정희 연구입니다. 후지쓰카 교수는 세한도를 포함해 추사가 남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며 추사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1934년 의식 있는 학자들이 모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직한 학술단체가 진단학회였습니다. 진단학회는 8년 후인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핵심 회원들이 투옥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활동을 재개해 현재는 5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단학회터를 뒤로 하고 걷다가 추사의 대련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만났습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심용식 소목장의 공방인데 소목학교를 운영하며 목가구나 창호를 제작하는 소목 기술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대문 위에 걸린 `淸圓山房'은 생존해 있는 저명한 서예가의 글씨이고 대문 양쪽에 걸린 `畵法有長江萬里'와 `書藝如孤松一枝'는 추사의 글씨입니다. 글자 그대로 범역하면 `그림 그리는 법은 긴 강이 만리에 뻗친 듯하고 글 쓰는 기법은 외로운 소나무한 가지와 같다'이겠지만 이 글귀가 품고 있는 깊은 뜻은 이 풀이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림과 글씨에 대한 추사의 생각을 담고 있는 이 글씨의 원본 족자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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