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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5주년>총평-2005년 한국의사들의 자화상
<창간 45주년>총평-2005년 한국의사들의 자화상
  • 승인 2005.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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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2005년 한국의사들의 자화상

 

허대석<서울의대 의료정책연구실>

 

잘못된 제도로 직업 정체성에 혼란느껴

 

신뢰회복위해 내부문제 적극 해결해야

 

 

 이번 조사는 의사들이 의료사회를 스스로 평가한 것이니 일종의 의사사회에 대한 `自畵像'을 그려본 셈이다. 결과를 정리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의사들 스스로가 `의사'라는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자나 국민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고 판단하는 의사가 67.2%이며, 이 같은 상황이 미래에 오히려 더 악화되리라고 보는 의사들이 82.7%에 이른다. 이 같은 불만족은 의대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종사하는 개원의 계층에 심각하게 표출되고 있고, 그들 중 59.5%가 다른 직종으로의 전업이나, 이민을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잃고 있다.
 최근 20∼30년간 사회적인 문제가 될 만큼 이공계 고등학생들 중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의과대학으로 진학하여 힘든 의학교육을 받고 사회로 진출하고 있으나, 세계 속의 한국의료의 위상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한국의 자동차나 전자기기가 세계를 무대로 경쟁력을 키워 온 것과 대비된다. 이번 조사에서 39.4%의 의사, 특히 전공의중 41.3%에서 `건강기능식품'의 판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결과와 현재 의사들이 한국사회 속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과대학을 지원한 학생들의 자기 소개서에서 `왜 의과대학을 지원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국민들의 피부관리, 비만관리, 건강기능식품판매 등이 의과대학 진학의 목적이라고 답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가족이 불치병으로 고통 받으며 임종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혹은 `병원24시'와 같은 TV프로를 보고 감동을 받아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대부분 기술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한 우수한 인재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성취와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보람을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가지기 어려운 현실을 이번 조사결과가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2000년 의료사태에서는 약사들과의 갈등으로 단체 파업이라는 사태를 초래하였고, 최근 한의사들과 충돌하고 있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의료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리더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영역 다툼을 벌이는 한 직종으로서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의사의 위상은, 환자를 위해 밤을 세워가며 노력하고도 `살인방조죄'로 매도당하는 `보라매사건' 판결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번 조사에서 대부분의 의사들은 한국의료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일그러진 원인을 잘못된 `의료제도'에서 찾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의료사회의 틀은 건강보험제도에 의해 이루어졌고, 제도운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정부의 `공급자 일변도 통제'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저수가정책, 보험 급여와 관련된 심사평가원의 경직된 규정들, 3차 의료기관으로 몰릴 수밖에 없게 짜여진 의료 전달체계, 의료 사고에 노출되어 있으나 정당한 진료 행위조차도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 등 잘못된 제도들은 열거하기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잘못된 의료제도의 개선'이 최우선 과제임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로 귀착된다. 설문조사 결과에서 제시되어 있듯이, `정부에 대한 정책건의 확대 및 정책 결정에 대한 참여기회의 확대 노력' `언론매체를 통한 대국민 홍보' 등이 중요함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action plan이 없다는 것이다.
 2000년도의 파업과 같은 집단행동은 의사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불신만 더 키울 위험이 있다. 결국 의사조직 내부부터 국민의 신뢰를 얻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또 실천에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일지 모르나, 이 같은 自淨 노력이 없이 남의 탓만 한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고 본다.
 미래에 의사의 사회적 위상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답은 3.4%에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82.7%은 오히려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기존 의료제도의 틀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은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료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 나갈 것인가? 변하고 있는 사회에서 의사뿐 아니라 다른 전문직의 위상도 변하고 있다. 사회제도라는 틀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에서의 의사의 역할에 대한 의사들의 생각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70% 찬성), 민간의료보험 도입(86% 찬성), 의료시장 개방(66% 찬성)과 같이 의료제도의 틀을 현저히 변화시키는 방향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결과다.
 기존의 의료제도 하에서는 필수의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산업으로서의 의료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재원은 제대로 확보하지도 않고, `모든 의료는 필수'라는 전제로 의료 전체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의도로는 저수가정책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의료 행위 중 어떤 부분은 필수적이고, 어떤 부분은 선택적인 것인지를 구분하고, 필수의료 부분에 대해서는 공공의료를 통한 보장성을 강화하고, 선택의료에 대해서는 국민들에게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의료시장 개방 등의 세계적인 추세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의료가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논리에만 밀려, 정부 주도의 일방적 의료정책으로 야기된 왜곡된 제도를 국제표준(global standards)에 맞게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의료에 대한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의료제도 개선의 추진력은 외적투쟁보다는 의료사회의 자정노력을 통하여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료계 내부에서 의료 윤리를 지키지 않는 비도덕적인 의사를 징계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면 이들이 결국 암적인 존재가 되어 전체 의사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외적요인으로 야기된 문제들은 투쟁이라는 수단으로 해결을 시도해 볼 수 있으나, 의료계 내부의 문제는 의사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개원의들은 `전공파괴'라는 현상 속에 동료의사의 전문 기술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 습득한 전문 지식을 의사 상호간에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기술료'를 어떻게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의사 사회가 이같은 문제를 원칙에 입각하여 해결해 나가지 못한다면, 한의사들이 CT와 같은 기기를 이용한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할 논리를 스스로 잃게 될 것이다. 의사도 사회의 다른 전문직종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부분은 과감히 정비하고, 새로운 변화는 받아들이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사회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설문조사가 기존의 틀에 안주해서는 공멸할지도 모른다는 의사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적인 변화를 위한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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