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7:56 (금)
또 하나의 `오만과 편견'
또 하나의 `오만과 편견'
  • 의사신문
  • 승인 2015.04.06 1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1〉

이백년 전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그동안 꾸준하게 영국인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1999년 영국 BBC 방송의 `지난 천 년 동안의 최고 문학가' 조사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두 번째로 제인 오스틴이 선정되었고, 2003년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한 책' 투표에서 `반지의 제왕'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 소설은 여섯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2005년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된 바 있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거창한 제목 때문에 철학이나 사회학 서적이라고 짐작했으나 보편적인 청춘 남녀의 오해와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특히 여성의 세밀한 관점에서 사랑과 결혼을 묘사해 현대 연애소설의 시조가 되었다. 어려운 환경의 착한 여성이 왕자님을 만나 신분상승으로 해피엔딩이 되는 신데렐라 신화의 모델 소설이라고도 한다.

 의과대학 우리 동기생 중에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K가 있다. 나하고 학생 번호가 꽤 떨어져 있어, 의예과 시절 서로 다른 반에서 공부하였고 의대본과에 진급해서는 강의는 같이 들었으나 임상실습은 다른 그룹으로 배정되어 교육받았다. 자연히 학교에서 서로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다. 어울리는 친구도 같은 고향에서 올라온 학생들이었다. 또한 성격이 완전히 달라 나는 조용한 타입이었고 그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학교 공부에 대한 집중도도 같지 않아 방과 후 나는 도서관에 있었고 K는 교실에 남아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즐겨하였다.

 친하지 않아 잘 몰랐지만 K의 집안은 부유한 것 같았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부모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녀를 위해 강남에 큰 평수의 아파트를 사주었고 가정부도 두고 있단다. 당시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공부에 전념하던 나하고는 다른 점이 많았다. 활발한 성격이어서 사소한 일에도 큰 소리로 말하는 사투리가 가끔 달갑지 않게 들리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인생을 더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번에 의과대학 동기생 끼리 일본여행을 하였다. 마침 내가 쓴 자서전 성격의 수필집이  출판되어 참석자 모두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여행 첫날 저녁 온천탕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식당에 도착하니 K 옆 좌석만 비어있었다.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앉아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반겼다. 수필집을 보고 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과거이야기도 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그는 광주에서 큰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에 부유하게 지냈다. 막연하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처럼 사업가가 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방과 후 학원에 다니고 학습지도도 따로 받으면서 공부에 집중하니 성적이 급속도로 좋아졌단다. 마침내 학생 중 최우수권이 되었고, 대학교 입시 접수 때 담임선생님은 의과대학 진학을 권하였다. 집안에 의사도 없고 의료계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는 상태이지만 학교의 명예도 고려한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의대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무지하게 많은 지식을 무조건 외우는 교육이었고 멘토가 될 만한 교수나 선배도 없었다. 공부에 흥미는 없었고 오직 낙제를 하지 않겠다는 집념하나로 의과대학 생활을 버티면서 겨우 졸업하였단다. 스트레스는 같은 처지의 학생들과 카드놀이와 음주로 해결하였다. 대학졸업 후 지방 병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의로 수련을 받고, 그곳에서 개원하였다.


입원실도 갖춘 5층 건물을 지어 처음부터 크게 시작하였다. 다행히 병원은 잘되었으나 그는 또다시 개업의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 지역의 정형외과 병원은 교통사고 환자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경찰과 자동차 보험회사의 호의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의사로서 이들과 일종의 상거래를 해야 되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자존심이 강하고, 생활이 이미 풍족하니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마침 건물 가격도 폭등하여 고민 끝에 40대에 병원을 매각하고 의사생활을 접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조선시대의 사대부 같은 생활이었다. 독서와 사색으로 정신적 수양을 닦고, 서예, 회화, 음악으로 풍류를 즐기며 살고 싶어 했다. 주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철저한 성격인 그는 이겨내고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배우며 실천하고 있단다. 또 등산과 체력 단련도 시간 맞추어 하고 어려서부터 들었던 남도 판소리를 따로 공부하고 있다. 인터넷에 블로그도 만들어 이미 많은 사람과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의업을 대치할 만한 실용적인 일을 찾지 못해 아직도 미진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여러 생각을 하였다. 우선 마음 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삶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는 과감성과 실천력이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막상 K 같이 의업을 포기하고 야인이나 선비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께다. 여건이 되어도 돈, 체면, 비판 등이 두려워 대부분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는 일종의 자유인自由人인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우수한 성적 때문에 진로를 잘못 선택하여 좌초되었던 인생이 안타까웠다.

 지금은 자기가 원하는 데로 살고 있지만 그의 젊은 시절이 아깝다는 말이다. 그러나 의학지식과 의사경험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의학의 대상은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는 다행히 의사가 되었지만 우수한 학생들이 지루한 의학공부를 버티지 못하여 흥미를 잃고 심지어는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고등학교 성적이 좋으면 그 학생의 자질과 관심도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보내는 세태는 확실히 바뀌어야 한다.

 그에 대한 나의 오해와 편견이 무지에 의한 것이었다. 젊은 학창시절 6년을 같이 보냈지만 피상적인 비교로 내가 더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이미 갖추어진 순탄하고 평이한 삶을 포기하고, 진정한 내면의 생각에 부응하여 남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참된 인생을 위해서 나 보다 더 고민하며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언행으로 쉽게 사람을 평가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이가 들수록 정신적 유연성이 떨어져 많은 일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진선미眞善美는 내 편이라는 일종의 오만에 사로잡힌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타인의 진정한 피드백이 있어야 오만과 편견의 늪을 건너 겸손과 진실의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 세계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현재 찬란한 과학 발전의 혜택을 입고 살아서, 정신적 감성적 면에서도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는 착각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어 보면 오만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2세기 전 평생 미혼으로 지낸 작가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절정을 소설로 재구성한 예리한 지성과 풍성한 감성을 음미하기를 권한다. 왜 그토록 그녀와 이 소설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