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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의 미시사 微示史* 
땅콩의 미시사 微示史* 
  • 의사신문
  • 승인 2015.03.2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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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0〉

*전체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개별적, 개인별로 포착한 작은 사실로 재조명하는 역사. 전통적인 거시사 역사와 반대되는 개념임.

 오늘 헬스클럽에서 신장을 재어보니 169cm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작은 키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감회가 깊다. 우리 집안 남자들이 모두 작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160 cm 정도의 체격이었다. 할아버지가 15세에 동갑인 할머니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버지를 낳으셨다. 미쳐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신혼부부가 처음 낳은 아이이니 더욱 작았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시집을 왔는데 시아버지가 38세로 젊어 남편과 구별이 안 되더라고. 지금 같으면 노총각 나이에 시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당시에는 4월 초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나는 3월 생이라 가장 어린 신입생이었다. 적은 나이에 비해서도 발육이 늦어 학교 선생님이 지어준 별명이 땅콩이었다. 땅에 붙어 자라는 모습 같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편식이 심하였다. 주로 야채류만 즐기고 가끔 소고기만 먹지 닭고기, 돼지고기, 생선은 손도 대지 않았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가 편식을 없앤다는 한약을 사와서 먹였다고 한다.

 학교 공부는 제법 하여 6학년이 되자 당시 중학교 입학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였다. 200점 만점의 입학 시험에 체력장이 4점이나 되었다. 달리기, 턱걸이, 멀리뛰기, 던지기를 각각 1점 만점으로 하여 학생의 성취도에 따라 배점을 하였다. 어린이들이 입시 공부만 하지 말고 운동도 하여 건강을 지키자는 의도였지만 작은 땅콩인 나에게는 아주 불리해, 절반을 겨우 넘는 점수를 받았다. 학습 능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의 경쟁이라 체력장에서 뒤쳐진 점수를 필기시험으로 만회하기가 쉽지 않았다. 핑계이지만 이 때문인지 나는 일차 시험에서 낙방을 하였다. 체육 관련 중학교가 아닌데도 결국은 지적 능력보다 체력이 좋은 학생을 뽑게 되는 입시제도가 아닌가? 더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한 친구는 시험을 앞두고 팔뼈가 부러져 체력장 점수를 거의 못 얻게 되자 부득이 학교를 낮추어 진학하였다. 후진국 형의 획일적인 입시제도였다.

 나는 체력장 중에서 턱걸이를 제일 못하였다. 6개를 해야 만점인데 처음에는 그저 철봉에 매달려 있기만 하였다. 꾸준히 연습하여 4개까지는 성공하였으나 더 이상은 불가능해 보였다. 입시시험 전날 밤에 온 가족의 응원 속에 안방 문간의 들보에 매달린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드디어 6개를 기록하였다. 자신을 얻어 다음 날 실제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고, 나는 정신적인 의지력의 중요성을 처음 경험하였다.

 중학교에 가니 키 순서대로 출석번호를 정하고 책상자리도 배치하였다. 나는 반에서 3번이 되었다. 즉 60명의 학생 가운데 3번째로 작은 학생인 것이다. 심지어 2학년 때는 2번이 되었고 여름방학 동안에 1번인 친구가 훌쩍 커져 실질적인 1번을 한 적도 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 한 명은 키가 커지기 위해서 여름방학 내내 농구장에서 뛰어다녔다. 소원대로 그는 점차 꺽다리로 변해서 작은 땅콩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장관까지 했는데, 그 때 단신을 이겨냈던 굳건한 의지가 출세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1961년 군사혁명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얼마 안된 해였다. 정부에서 쌀 수확량을 조사해보니 기록적인 풍년이 들었다. 실제는 평년작이었으나 모두들 군 출신 대통령이 두려워 조금씩 많게 보고한 것이다. 수출을 독려하던 정부는 계산상 남은 쌀을 일본에 팔았고 이듬해 봄이 지나자 우리나라 전국 쌀 창고가 바닥이 났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정부는 외국에서 밀가루를 다량 수입하고 원조받아 국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동네반장이었던 어머니는 집집마다 공평하게 밀가루를 배급하느라고 골치를 앓았다. 여름 내내 모두 칼국수와 수제비로 배를 채웠다.

 긴 겨울방학 때 점심은 으레 그 동안 먹고 남은 밥에 물을 넣고 누룽지로 끓여 김치 포기와 함께 온 가족이 먹었다. 중산층이던 우리 집도 김밥은 소풍 가서야 먹는 음식이었고 점심 도시락에 계란이 들어가면 최상품이었다. 어린이 모두 입 가장자리가 갈라져 있었고 어른들은 그냥 입이 커진다고 하였다. 사실은 비타민 결핍증이었다. 당시 비타민은 활력을 주고 건강을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제법 번듯한 기업체인 제약 회사들은 신문, 라디오, TV 광고에서 비타민이 키를 크게 한다고도 선전했다.

 나는 땅콩을 벗어나기 위해서 고기를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종합 비타민도 복용하였다. 수시로 마루기둥에 내 키를 표시하여 측정하고 기록하여 놓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15세 겨울에 드디어 150cm를 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기대하였으나 여전히 번호는 3번이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는 힘으로 많은 것을 결정해, 키 작은 우리들은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비슷한 꼬마 친구가 자기는 어른이 되면 키 큰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어수룩한 나는 그 이유를 물었고 그 대답이 엉뚱하였다. “공도 큰 공이 잘 튀지 않느냐?” 하여튼 이에 암시를 받은 나는 여자 중학생 시절 장신이어서 거꾸로 고민했다던 우리 집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내 키는 늦게까지 조금씩 자라 고등학교 2학년때 8번이 되었다. 내친김에 3학년이 된 첫날 뒷굽이 높은 워커 군화를 신고 등교하였다. 출석번호를 정하기 위하여 운동장에서 키 순으로 나열을 할 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무조건 가운데에 섰다. 담임 선생님이 뒤통수를 치면서 앞으로 보냈지만 몇 발자국만 움직여 드디어 13번이 되었다. 나에게는 처음 두 자리 수가 된 쾌거였고 집안 식구 모두 기뻐하였다. 대학에 들어 온 후에도 조금씩 자라 거의 평균 신장이 되었다. 참고로 내가 입학 당시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평균 키가 168cm였다. 이만하면 땅콩에서 벗어 난 것이다.

 왜 이토록 나는 큰 키에 연연하는가? 인류 원시 시대부터 남자의 체격은 그 사람의 능력을 의미하고 집단에서의 위치를 나타냈다. 동물 수렵과 식품 채취로 먹을 것을 구하여 자기 식구를 챙기는 데에는 크고 힘있는 몸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큰 남자는 우두머리가 되고, 그와 짝이 되면 자식도 그 우수한 형질을 이어 받을 수 있어 여성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큰 몸집은 선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우연히 이렇게 태어난 남자는 때로는 세상 일을 쉽게 생각하고 내실을 채우지 않아 `키 큰 사람은 싱겁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단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열등한 조건을 극복하려고 실력을 키우고 노력해 `작은 고추가 맵다'가 된다.

 상황이 많이 달라진 현대에서 큰 체격이 반드시 유리하지 만은 않다. 먹거리를 직접 찾지 않고, 여러 가지 능력의 힘으로 식구를 챙기게 되었다. 강인한 체력보다 높은 지혜와 깊은 지식이 더 중요해졌다. 남자에서도 무뚝뚝함보다 여성에 가까운 상냥함과 이해력이 필요해졌다. 사람 간의 대화와 소통이 모두에게 절실해졌다. 이제는 높은 지능과 감성, 소통의 능력이 바람직한 형질로 여겨지고 있다. 몸이 작은 남자라도 나름대로 이런 능력이 있으면 살아 가는데 유리하고 인기 있는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직도 `땅콩 콤플렉스'가 있는 나는 다소 자신감을 찾았다. 퇴근 후 집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니 시중에 다음과 같이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키만 크면 나머지는 성형외과에서 모두 해결해 미남, 미녀를 만들어 주는데, 작은 키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이 말에 나는 깨달았다. 아 참! 우리나라에서 장신 선호는 사회생물학적 이유보다도 맹목적인 외모지상주의 때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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