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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에 열린 미국 암연구학회
밸런타인데이에 열린 미국 암연구학회
  • 의사신문
  • 승인 2015.03.0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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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

 지난 2월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 샌디에고에서 열린 암연구학회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최신 지견에서 한 주제씩 선정하여 매년 2월 중순에 개최하는 모임으로 우리 실험실에 많은 도움이 되어왔다. 올 해에는 특히 핵의학 분자영상에 관한 내용이어서 작년에 이어 참가하였다.

 주제가 우리 분야에 관한 것이어서 가까운 동료학자들이 여러 명 참석하였다. 핵의학을 35년 정도 전공하다 보니 세계적인 대가들을 다수 알게 되었고 서로 연락하며 공동연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는 우리 선생님의 은덕이 크다. 스승이신 고창순, 이명철 교수님을 도와 아시아대양주핵의학회, 세계핵의학회와 2014년 세계분자영상학회를 서울에서 성공리에 개최하여 우리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사무총장, 지역 대회장을 맡았던 나는 유수한 학자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았다.

 또한 가톨릭 의대 명예교수인 박용휘 교수님에게 큰 혜택을 받았다. 선생님은 학문적 능력이 탁월하셔서 일찍부터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미국핵의학회에서 연제 발표를 하였고, 미국 잡지에도 첫 논문을 실은 바 있다. 또 뼈 관절, 폐 핵의학 영상에 관한 영어 교과서도 출판하여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하셨다. 이러한 성과로 미국핵의학회 잡지를 비롯한 여러 학술지에서 일찍이 편집위원으로 활약하셨다. 가톨릭의대를 정년퇴직 하실 때 미국 학회지의 편집위원 자리를 자발적으로 물러나면서 대신 나를 추천하셨다. 나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 핵의학이 최근 큰 성장을 보이고 있어 잡지마다 편집위원을 구성할 때 한국 대표로 나를 위촉하여 현재에도 10여개 학술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소위 대가라는 사람들도 가까이에서 보면 평범한 사람보다 더 솔직하고 순수하다. 한가지 일에 일생을 전력투구하다 보면 다른 면에서는 어수룩하기 일쑤이다. 또 어떤 분야에 대가가 되기까지는 집중력과 끈기가 있어, 흥미가 생기면 다른 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나는 가능하면 이들과 어울려 많은 것을 배우려 했다. 이번에 참석한 미국의 알라비 교수, 블라스버그 교수 댁에서 하루 밤씩 숙박한 적도 있다.

 이들과 우리 학자들을 연결시켜 주는 일이 환갑이 지난 내가 할 역할인 것 같다. 옛날에 고창순 선생님은 국제학회장에서 강의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로비에서 외국사람들과 만나곤 하였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적절한 행동이셨다. 선생님이 단편적인 최근 지식을 얻는 것 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우리 젊은 사람들을 이들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내 절친인 독일의 바움 교수가 전립선암의 표적치료에 획기적인 성적을 발표하여 우리 팀과 공동연구를 기획 하기로 하였다. 또 미국 NIH의 고바야시 선생도 박사후 연구원 자리가 생기면 우리 실험실 졸업생을 우선적으로 뽑기로 약속했다. 요즈음 전자기술의 발달로 학문적 내용은 원격강의로 대신할 수는 있지만 사람간에 만나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학술대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의 강의 내용은 최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엑소좀이었다. 엑소좀은 암세포에서 분비하는 10 나노미터 정도의 막소포체(membrane vesicle)로 다른 세포와 소통하는 중요한 방법이란다. DNA와 RNA, 단백질이 들어 있는 엑소좀을 배출하면 다른 암세포와 주위에 있는 면역세포, 혈관세포, 섬유세포 등을 들어가 이들을 변화시킨다. 즉, 암에서 분비하는 엑소좀은 다른 암세포에 들어가 악성 성질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주변 정상세포에 영향을 주어서 암의 성장과 전이를 도와주는 세포가 되게 변형시킨다. 세포 간의 소통으로 암세포가 증식하고 전이를 일으키는 전략이다.

 마침 2월 14일이 밸런타인데이였다. 젊은 연인들이 서로 초콜릿을 선물로 주면서 공공연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나누는 날이다. 로마 클라우디스 2세 황제가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하였는데, 발렌티누스 사제가 이를 어기고 혼인성사를 집전하였다가 순교한 날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서양에서는 새들이 교미를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 날은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따로 한달 뒤인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고 구애한다고 부축이고 있다. 그러나 초콜릿을 팔려는 장사 속이고 정작 서양에는 이런 풍습은 없다.

 거리에는 아침부터 예쁘게 화장을 하고 정장을 한 선남선녀로 가득하고 차량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었다. 레스토랑 마다 기다리는 사람으로 줄을 이루었고, 모두 외식을 하는 날이어서 가족행사도 많아 보였다. 어린이들은 너도나도 풍선을 들었고, 여성들은 미모를 뽐내면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 다만 미국 여자들은 대부분 뚱뚱해 이를 감추려는지 검정색 드레스를 많이 입어 특이 하였다. 사회생물학적으로 보면 모두 자식을 낳아 자기의 유전자를 번식시키려는 행동양식이다. 밸런타인데이라는 기회와 교류의 장을 통해 효과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부각시켜 이성의 사랑을 얻고 후손을 남기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감정표현이 솔직하여 이런 날엔 우리나라와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남녀 모두 몸의 곡선이 그대로 나타나는 꼭 끼는 옷을 입고 유혹하듯이 화장한 얼굴에 애교에 들뜬 말투는 노래에 가깝다. 거리 곳곳에서 포옹과 애무를 거리낌없이 하고 차 안의 음악소리와 오토바이의 광음으로 거리는 북적거린다. 85세인 지금도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박용휘 교수님은 남녀 사랑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실감하는 날이었다. 선잠에서 깨어 난 새벽 2시에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이 시간에도 거리는 혼잡한 낮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낮에 공부한 엑소좀과 세포간의 소통, 암의 증식에 관한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세포, 사람, 인간사회 같이 작거나 큰 모든 것이 서로 간의 밀접한 소통에 의해 생명력이 유지되고 또 높아진다. 밸런타인데이나 학술대회는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교류의 기회이고, 초콜릿은 사랑을 전달하는 일종의 엑소좀인 셈이다.
 우연하게도 심포지엄이 열린 장소가 샌디에고 하드록호텔(Hard Rock Hotel)이었다. 호텔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흥겨운 록음악과 젊은 남녀들의 들뜬 소리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열린 이 학술모임은 크고 작은 유기체에서 상호 소통의 중요성을 나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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