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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유혹, 그 덕유산!” 〈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유혹, 그 덕유산!” 〈하〉
  • 의사신문
  • 승인 2015.02.1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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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 호(서울시의사회 부회장)


쪽빛하늘과 눈꽃…`치열한 유혹' 또 못 이길듯                     

 멀리 우뚝 솟은 중봉 뒤로 웅장한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도 모습을 들어낸다.
 한떼의 아주머니 산행팀들의 즐거운 수다가 조용한 덕유산을 들썩인다.
 “아이고∼, 눈을 들어 좌우로 볼때마다 여기도 절경, 저기도 절경이니 다리 아픈줄도 모르겠고만!”
 한 아주머님이 내 어깨를 치고 가며 일행에게 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름다운 대자연에 대한 시각과 감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일치하는 듯 하다.
 자연에 대한 소통은 이리도 같을진대 왜 저 속세에만 내려가면 아웅다웅 불통인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인자요 산이요, 지자요수라 하여,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하지 않았는가?
 아니 역으로 산을 좋아하다 보면 어질게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동엽령을 지나면서 부터 좁은 등산로에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정체가 심해지고 몸도 지치니 산행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송계 삼거리에서 조금 더 가니 백암봉이 나타나고 약 40여분 더 산행을 하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광할하고 장엄한 덕유평전이 나타난다.
 머지않은 봄에 수많은 꽃들로 수를 놓아 꽃이불을 덮고 있을 평원을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본다.

1594미터의 준봉인 중봉을 향한 긴 계단을 쉬엄쉬엄 힘겹게 올라간다.
 이젠 오기로 숨이 턱에 차 오를때 까지 쉬지 않고 오르는 그런 객기를 버린지는 오래다.
 중봉을 지나 향적봉에 이르는 평탄한 능선길에 이르니 덕유산 눈꽃산행이 절정에 이른듯하다.
 눈꽃뿐만 아니라 보석같이 반짝이는 상고대도 적잖이 감상 할 수 있었다.

드디어 1610미터 ,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높은 향적봉에 도착하였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도라를 타고오는 인원들과 백련사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산이 아니라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장터다.
 동료들 찾는 목소리, 사진 찍는다고 구호 외치는 소리,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 향적봉이 심한 겨울 몸살을 앓는다.
 향적봉 표지석 옆에서 인증샷을 찍고 싶었지만 삐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포기한다.
 잔뜩 찌부린 하늘은 이미 청명한 겨울 쪽빛 하늘로 변해 하얀 설경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멀리 바라보니 수십겹의 출렁이는 산등성이 내 앞으로 밀려온다.

 곤도라를 타고 하산할 것인가, 아니며 2시간 50여분을 더 걸려 백련사를 거쳐 무주구천동길로 하여 뒷풀이 장소인 삼공매표소 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2시간 기다려야 곤도라 탑승차례가 온다는 말에 다들 걸어 하산하는데 합의했다.

백련사까지의 하산길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고 눈이 많이 쌓여 아이젠 착용을 했어도 여기저기서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행이 눈이 많이 쌓여 큰 부상위험은 덜하다.
 미끄러질세라 온 몸 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하산하니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흐른다. 무릎도 이젠 무리가 가는지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하산길, 쪽빛 하늘에 찌를듯이 쭉쭉 뻗은 잘생긴 나무들을 따라 위로 시선을 옮기다보니 새 둥지들이 사방천지에 널려있어 장관이다. 가만 보니 새둥지가 아니라 겨우살이다.

 5대 항암약초로 알려진 겨우살이가 사람들 손에 채취되지 않으려 저 높고 높은 곳에 위치한것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치열한 삶이 좀 안쓰럽다.
 약 한시간 좀 넘게 조심스레 내려와 신라 흥덕왕때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백련사에 다다랐다.
 고찰은 이미 불타 없어지고 새로 건축한 사찰로서 아쉬움이 크다.

 연재성 대장이 대장정이 끝난 줄 알고 격려의 악수를 청한다.
 “대장님, 여기서 6키로를 더 내려가야 합니다. 1시간 30분 이상 더 걸리는데요” 순간 연 대장의 실망한 눈빛이 역력하다. 아마도 여기서 20∼30분이면 뒷풀이 장소에 도착하는걸로 착각했나보다.
 무주구천동 계곡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도 아직 하산지점까지는 약 5.6 키로미터나 남아 있어 빨리 가도 1시간 30분이상 더 내려가야 한다.
 다행히 평탄한 길이 이어지지만 여기저기 얼음덩어리 길들이다. 자칫하면 지루할 마지막 하산길 옆에 천하의 절경인 구천동계곡이 눈앞에 펼쳐지며 녹초가 된 심신을 도닥인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던 나제통문을 제 1경으로 시작하여 향적봉까지 약 36키로에 결쳐, 눈부신 33경이 품은 소, 담,폭포들로 어우러진 계곡들로 인해 눈의 호사가 다시 시작된다.

구절양장(九折羊腸) 9000굽이를 헤아린다하여 구천동 계곡이라 붙여진 이 계곡을 눈에 담기 바빠 하산길 발걸음이 자꾸 지체된다.
 이속대 명경담, 안심대, 청류계, 금포탄, 비파담, 사자담. 이월담, 월하탄….
 마음이 씻기고 눈이 씻기고 또한 귀가 씻긴다.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되어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이름을 붙이며, 진정한 풍류와 멋과 흥을 즐기며 산 선인들이 새삼 멋져 보이고 존경스럽다.
 계곡의 바위와 돌들에 소담스런 새하얀 시루떡들이 뭉텅뭉텅 쌓여 있는 한폭의 수채화가 겨울 오후의 적막감과 함께 고즈넉하다. 수정같은 얼음 밑으로 추위에 아랑곳 없이 재잘거리는 유리알 계곡물들이 폐부까지 흘러 들어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33경중 15경인 월하탄을 끝으로 하산지인 삼공매표소에 다다른다. 나머지 절경이 더 이어지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뒷풀이 장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 45분. 이렇게 장장 12시간 30여분에 걸친 덕유산 종주산행이 끝났다.

 대개 10시간 넘는 장기산행을 마치면, “내가 다시 이곳에 오면 바보지” 라는 결의를 다지지만, 덕유산 천지에 펼쳐진 눈꽃들이 하산하자 마자 눈앞에 밟힌다.
 사방천지에 흐드러진 눈꽃들, 낮게 깔린 회색빛 하늘아래 휘돌아 치는 눈보라 속의 바람결도 눈앞에 보인다.
 이 그리움들이 켜켜이 쌓여 걷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쁜 들숨날숨을 내뿜으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나를 또 다시 이 덕유산에서 만날것이다.
 지금, 눈을 감으니 매섭던 한겨울 덕유산의 추억이, 이젠 따스한 군불되어 내 가슴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덕유산 눈꽃.
 덕유산 세찬 바람.
 덕유산 쪽빛 하늘.
 어쩔 수 없는 한겨울의 이 치열한 유혹을 누가 감히 떨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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