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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명강의
내가 생각하는 명강의
  • 의사신문
  • 승인 2015.02.0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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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7〉

 *2월에 접어들면서 우리 의과대학은 벌써 개강을 하였다. 학생 강의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적어보았다.
 
 “교수는 평생을 공부하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직업이다.”
 대학생 시절 지도교수였던 김기환 교수님의 지론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이고 흔한 것이 강의법이다. 나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중고등학생을 학습지도하고 전공의 시절 교수님의 학생 지도를 도와드린 적도 있지만 198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정식 강의를 하게 되었다.

 처음 강의를 할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어색한 태도와 머쓱한 표정으로 강단에 서서 내가 첫 강의라는 것을 밝히자 학생들은 박수로 환영하였다. 비로소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히치콕의 추리공포영화를 보고 교수직을 동경하게 되었다. 여주인공 남편이 저명한 대학교수로 다른 도시로 강의를 간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사건 이야기였다. 그 교수는 얼굴도 안 나오는 배역이나 학문의 깊이가 있어 먼 곳에서도 초청받는다는 내용에서 내 미래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았다. 많은 영화 중에서 왜 이 공포영화 내용에서 장래 직업을 정했는지는 나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

 학교 선생이 되어 처음에는 강의하는 것이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 지적 호기심이 가득찬 학생들의 또렷한 눈동자가 모두 나를 따라오고, 어려운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내 말에 감탄사가 뒤따르고, 기초의학 지식을 실제임상 증례와 연결하여 설명할 때 학생들의 표정과 몸에서 나타나는 존경의 반응이 나를 기쁘게 하였다. 연예인도 비슷한 경험을 하겠지만 우리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의를 반복하면서 흥분과 즐거움이 격감하였다. 특히 현장 교육을 강조하는 의과대학의 교육 방침에 따라 강의실 강의는 줄이고 병실이나 실험실에서의 실습강의는 늘어났다. 학생들이 5∼10 명씩 소그룹으로 핵의학과에 실습을 나오니 비슷한 강의를 매 주하고 있다. 중요한 내용은 반드시 모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실습강의는 반복의 연속이고 거의 외우고 있을 정도이다. 변화를 주기 위해 증례를 발표시키고 토론을 유도시키고 때로는 영어로 강의를 진행했으나 권태롭기까지 했다. 중고등학교시절 선생님들이 때로는 괴팍하기도 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된다.

 교수 생활을 30년이나 한 요즘에야 명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교육학에 전문지식은 없지만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명강의란 무엇인가? 물론 쉽고 선명하게 진행하여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을 모두 학생들이 이해하는 강의이다. 단순한 강의보다 효과적인 지식 전달을 위한 준비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강사는 그림, 표, 표본 등을 이용하고, 학생들에게 수업 전에 조사를 시키거나, 관련 문헌을 미리 읽게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가는 대화식 토론을 선호했다. 이와 비슷하게 강의를 하면서 학생에게 질문을 하거나 또는 질문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런 상호소통의 수준과 효과를 명확하게 표현한 글이 있다. “질문이 없는 강의는 최하급, 선생님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하는 강의는 하급, 선생님이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면 중급, 학생이 질문하고 선생님이 대답하면 상급이다. 학생이 질문하고 강의 내용을 숙지한 다른 학생이 정답을 말하면 이야말로 최상급의 강의이다.”

 방대한 지식이 산재한 요즘 무엇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가도 중요하다. “강사는 본인도 학생도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고, 조교수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부교수는 학생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치며, 정교수는 학생들이 어떻게 알아야하는지를 가르친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금같이 컴퓨터에 막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피교육자가 쉽게 접근하는 세상에서 “how 나 what 보다 why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강의를 잘하려면 물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대학 학부 강의보다 대학원 강의가 더 많은 준비를 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문화된 깊은 내용일수록 책에는 미쳐 나오지 않는 다른 학자의 최신 연구결과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학술 내용을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강의의 부수적 사항도 철저히 점검하고 준비하여야한다. 컴퓨터, 강의 파일, 마이크, 강단의 위치 및 높이, 포인터의 작동 등 세부적 상황도 확인 한다. 2006년 서울에서 세계핵의학회를 개최할 때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학술대회의 하이라이트 강의를 맡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와그너 선생님이 무려 강의 한 시간 전에 강당에 나타나셨다. 일일이 기계작동을 확인하던 그는 학회 사무총장인 나를 만나자 사소한 기계적 문제로 강의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으면, 전혀 강의를 준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변명 아닌 설명을 하셨다.

 나는 강의를 준비할 때부터 수강자나 청중의 현지 상황을 알아보고, 내 강의를 듣는 그들의 입장을 상상해본다. 아침 일찍 맑은 정신으로 내 강의를 듣는지, 아니면 점심 식사 후 식곤증이 나타나는 시간에 강의를 하는지? 청중이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서 지쳐 있는지? 내 앞의 연자들이 이미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했는지? 등등. 이렇게 청중의 분위기를 알아보고 그 상황에 맞춰 강의하면 더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초임 교수 시절 의학교육실에서 강의법을 의무적으로 수강하게 되었다. 다소 어눌한 강의가 가장 좋은 강의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강의자가 너무 자신에 차있고 똑부러지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긴다. 학생과 같은 입장으로 천천히 하는 강의, 영어도 원어민이 하는 유창한 발음이 아니고 또박또박하지만 학생과 같은 억양으로 하는 강의가 듣는 사람에게 편하고 부담감을 덜 줄 것이다. 나는 강의에도 폭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슬라이드, 뜻을 알기 어려운 약자의 남발, 키워드 사용의 혼란, 중요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변죽을 울리는 강의,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이야기하는 강의, 모두 소위 멘붕에 빠지게 한다. 듣는 사람을 괴롭히는 강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강의를 연기같이 하라는 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소위 쇼맨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사의 몸짓, 언어, 억양 하나하나에 연출을 해서 청중을 주도한다.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명강사들은 이렇게 기획해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 3박자를 맞추고는 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강의이다. 청중들은 강사가 실속 없는 연기자인지, 실력있는 학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구별해 낸다. 내 절친인 피부과의 조광현 교수는 학생시절 문둥병의 권위자인 노교수님이 학생강의에서 나병균 배양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순간, 그 진솔한 태도에 감동하여 피부과를 전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과 강건욱 교수도 학생 때 이명철 선생님이 하신 PET(양전자단층촬영술)의 무한한 가능성에 관한 기대에 찬 강의를 듣고 전공을 굳혔다고 한다.
 교수가 일생 동안 집중한 주제에 관한 강의는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더불어 학문의 핵심을 알려준다. 한 가지 연구 내용을 항상 생각하고 분석하다 보면 그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강사의 자세에서 마음이 움직여 말하는 내용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머리에 담는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격언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내용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하는 강의가 가장 효과적인 명강의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과 공자님은 똑같이 쉽게 요점을 말씀하셨다.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닫게(覺)하고, 깨달은 것을 바르게 행(行)하게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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