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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유혹, 그 덕유산!” 〈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유혹, 그 덕유산!” 〈상〉
  • 의사신문
  • 승인 2015.02.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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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 호(서울시의사회 부회장)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엄동설한 세찬 바람…솜이불 덮은 능선에 탄성   

“선배님, 덕유산 산행 같이 가시지요. 장거리 산행에 경험이 많으신 선배님이 같이 가시면  많은 힘이 될 듯 합니다.”

 산행가기 2주전쯤인가, 의사산악회 훈련팀에서 약 12시간에 걸친 남덕유산 종주산행참가 여부를 알려 달라는 문자를 받고 일찌기 포기했었다.
 7년전 덕유산이 포함된 약 13∼14시간의 백두대간 산행이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방천지 수정 같이 빛나던 상고대에 눈이 홀려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던 탄성, 그야말로 천상의 겨울산을 보는듯한 감탄을 자아냈던 그 겨울의 덕유산. 그러나 그 호사스러움을 누린만큼 육체적 혹독함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이순(耳順)을 1년여 남긴 나이에 대한 부담감, 더구나 1박 2일 일정은 여러모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마침 그날 고등학교 산악회 시산제도 있고 해서 북한산에 갈 요량으로 답을 안하고 있었던차에, 조해석 등반대장의 위와 같은 거절키 어려운 문자가 날라온 것이다. 조대장의 사람 회유 방법이 참으로 고차원적이다.
 고민고민 끝에 결국 신청마감일 날 마지막 참가자로 신청을 했다.

 2015년 1월10일, 토요일 진료를 끝내고 집에 와 재빨리 산행준비 마치고 배낭을 메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들은 결국 다 들어가고 만다. 이미 일상화된 집착과 욕심은 배낭꾸리기에도 예외가 없다.
 드디어 오후 5시 압구정역을 떠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대전 통영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약 3시간 후에 저녁식사 장소인 함양군 서상면에 도착하였다.
 여러가지 잡어들을 푹 끓여 만든 어죽에 술 한잔 곁들이며 저녁을 대신하고 내일 산행을 감안하여 11시경 숙소로 향했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처럼 큰 방 두개를 빌려 14명이 두방에 나뉘어 잠자리에 들었다.
 유일한 여성팀원인 고근아 선생님에게도 독방이 허락되지 않는다. 방 한켠 멀찌기 떨어져 자리를 잡아드리고 방 한가운데를 연재성 회장이 경계를 짓고 눕는다.
 “나를 넘는자는 그대로 죽음이리니!”

 새벽 4시, 다들 부시시 일어나 준비에 부산하다.
 아침은 노민관 총무가 큰 밥솥에 죽반 밥반인 음식을 끓어 내놓았다.
 다들 그 주변에 앉아 말없이 먹는다. 맛으로 먹는 호강은 지금 이 시간이후엔 없다.
 드디어 5시 숙소인 거창군 월성리를 떠나 월성재로 떠났다.

늘 산행의 들머리는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발자국 소리와 리듬악기 같은 스틱 소리가 꽁꽁 얼어 붙은 강가 얼음을 깨듯 쨍하니 공기를 갈라 놓는다.
 몇일간의 맹추위에 익숙해져서 인지 영하 7∼8도는 추위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머리위에 쓴 헤드라이트 불빛들만이 반딧불 마냥 허공에서 춤을 춘다. 야간산행의 진풍경 중 하나다.
 얼마가지 않아 얼어붙은 적막 속에 거친 숨소리들이 뿜어져 나오며 숲속의 적막을 깨뜨린다. 자칫 다져지지 않은 등산로 옆길로 가노라면 순식간에 무릎이 눈속으로 푹 빠져 버린다.

 얼마후 조해석 대장의 지시에 따라 아이젠과 스패치를 착용한다.
 산에서는 경험자의 지시에 조신하게 따르는것이 곧 나의 행복을 보장하리니….
 월성재까지의 약 4키로 까지의 구간은 쉼없는 오르막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니 추운줄 모른다.
 슬그머니 팀원 두어명이 소리없이 뒤로 쳐진다. 이 엄동설한 세찬 바람속에서 큰 생리적요구를 해결 하려니 상상만 해도 내 엉덩이가 다 얼어 붙는 듯 하다.
 월성재 삼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조금 처진 팀원들을 기다리며 대열을 정비한다.
 뒤로 번호!, 하나, 둘, … 열넷 만!
 산행 중 간간이 이런 행위는 팀원간의 팀웍을 다지는데도 나름 역할을 한다. 곧 대열이 정비 되었다.
 이제 능선길이 시작되면서 차츰 동쪽으로부터 뿌옇게 먼동이 터오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의 풍경들이 들어오며 눈 호강이 시작된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한폭의 겨울 수채화가 눈앞에 펼쳐지며, 사방천지 찬란한 은빛 휘장들이 내 몸을 감싼다.
 이미 먼동은 밝아졌지만 잿빛 하늘과 주변의 눈꽃세상, 이를 떠 안고 있는 거무스름한 겨울 나목들이 함께 어우려져 장엄한 무채색 세상 풍경을 연출한다.
 북서면을 따라 능선을 걷자니, 한쪽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세찬바람과 때마침 하늘 가득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간혹 눈을 뜨기조차 어렵다.
 새하얀 솜이불을 살포시 덮은 산자락 위 능선길은, 짙은 검갈색 물감을 한껏 먹은 붓끝으로 힘차게 일획을 그은 듯 말갈퀴 형상을 보여준다.
 약 2시간의 거센 바람을 헤치며 어느정도 몸이 지칠 무렵, 때마쳐 삿갓골 대피소가 눈앞에 들어온다.
 대피소에 들어서니 바람을 맞이하지 않을 뿐인데도 너무 포근하다.

 이곳 화장실은 진정 심산유곡의 화장실인지 호텔 화장실인지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쾌적하고 따스하다.
 어느 여자분이 화장실을 나오며 안방보다 더 따스하고 포근하단다. 늘 느끼지만 화장실문화는 단연 세계 최고가 아닐까 한다.
 간단하게 컵라면으로 요기를 마치고 뜨거운 커피 한잔 마시니 금새 새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 몸 전신으로 흐른다.
 몸을 추스리고 삿갓재를 떠나 무룡산으로 향한다.

이른 새벽녁이고 종주 산행을 하는 팀이 많지 않아서인지 다른 팀을 만나지 않고 아주 호젓한 겨울산행을 즐긴다.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눈꽃들이 세찬 바람에 봄 벚꽃 흩날리듯 일순에 공중에 휘날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제 이곳은 습도가 그리 높지 않고 일교차가 크지 않았던지 눈꽃은 흐드러지게 피었으나 덕유산의 유명한 상고대는 눈에 띄지않아 조금쯤 아쉽다.

 때로는 턱에 차오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때론 갑자기 잠잠해진 바람속에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남동쪽 사면을 여유로이 걸어가고, 때론 탁 트인 산마루에서 한폭의 동양화 절경에 감탄하며 쉼없이 간다.
 1시간 40여분만에 1492미터의 무룡산에 도착하였다.
 용이 춤을 추었다는 무룡산. 산을 오르며 용이 춤추는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의 멋과 흥이 내 눈앞에 선하다.
 세찬 눈바람은 어느새 그치고 빛으로 낮게 깔린 하늘에 일순 광풍이 부니, 무대 위 커튼이 제껴지듯 순식간에 펼쳐진 광할한 덕유산 파노라마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날씨 변화가 심하니 이런 풍경에 눈이 호사를 누릴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다. 찰나의 순간이라 뇌리와 가슴에 더 선명히 꽂힌다.

 다시 2시간여를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니, 멀리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문 등산객들이다. 동엽령이다.
 동엽령은 동업령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 봉우리가 높고 멀어서 혼자서는 못가고 여럿이 모여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성매표소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향적봉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모여 호젓하던 등산로가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등산로는 갑자기 활기를 띤다.

 좁은 등산로로 인해 어깨를 부딪히기도하고 일반통행으로 인해 기다리고 하다보니 산행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한다.
 산악동호회에서 수십명씩 단체로 올라온 팀들이 많아 송계삼거리에 이르니 그야마로 인산인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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