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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의 영욕 나가사키
일본 근대화의 영욕 나가사키
  • 의사신문
  • 승인 2015.01.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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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6〉

일본 혼슈의 서쪽에 규슈가 있고 이 섬에서도 서쪽 끝에 나가사키가 있다. 변방이었으나 이곳은 17세기부터 일본이 서양과 유일하게 교역하는 항구였다. 막부는 뒤이어 들어온 그리스도교를 금지시키고 포교활동을 안하는 네덜란드(홀랜드)와 무역을 계속했다. 자연히 나가사키는 서양과학의 요람이 되었고 `홀랜드(和蘭) 학문'을 뜻하는 난학蘭學은 서양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나는 이곳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야마시다 교수를 지난 1월 15일 방문하였다. 갑상선암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인 그는 스승 나가타키 교수의 맥을 이은 일본갑상선학회의 중심인물이다. 우리 은사인 고창순 선생님이 나가타키 교수와 평생 절친히 지내셔서 나도 이 사제지간과 친교하고 있었다. 나와 동갑인 야마시다 교수는 대한갑상선학회의 특강 차 두 번 방한하였으나, 나는 이번이 초행길이었다.

 방문 목적은 갑상선암의 발병기전과 분자생물학적 진단 치료법을 토의하고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고리 원자력발전소 주민이 방사능 피폭으로 갑상선암이 생겼다고 법정 소송을 하고 있어, 이에 대한 의견도 듣기 위해서였다. 야마시다 교수는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 사건 후, 의료대책에 참여하고 있고, 추후 발생할 수 있는 갑상선암의 추적 조사 책임자이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나가사키 시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이어서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이다. 당시 24만이었던 인구 중 단 한 발의 원폭으로 7만4천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숫자 환자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핵폭탄이 떨어졌던 자리는 의과대학 바로 옆이었고, 지금은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원폭피해박물관을 설립해 놓았다. 박물관에서 본 원자폭탄의 폐해는 너무나 크고 비참하였다. 일본제국 종말을 위한 것이라는 변명이 설득력이 없는, 역사상 인류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고 아픈 상처이다. 어떻게 보면 철학이 없이 성장한 서양과학의 상징적인 무덤이다. 대학에 원폭후장애의료연구소(Atomic Bomb Disease Institute)가 있어 야마시다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이 연구소는 70년 동안 원폭피해 질병을 연구해왔지만, 전반적인 방사선보건 연구도 수준이 높아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의 독특한 점은 `물에는 물, 불에는 불'이라는 대응 방침이다. 즉, 후쿠시마 원전사고 지역 사회에 원자력 시설로 보상하기로 하였단다. 이 지역에 의료용 사이클론 두 대와 PET-MRI 최신장비를 설치하여 핵의학 시설로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이다. 주민들도 동의하여 서로 상당히 이성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우선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각자 자기 이익이 큰 처리 방향을 주장하여 타협이 어렵다. 또 현재 일본에 있는 60 여 개의 모든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중단하고 대기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부족한 전력을 석유와 석탄을 이용한 화력발전소에 의존하고. 이런 막대한 경제력 부담을 견디고 있는 일본은 확실히 기초가 튼튼하고, 우려했던 사회적 혼란도 미미해 의식수준은 우리보다 위 단계인 것 같다.

 나와 윤혜원 교수는 야마시다 교수팀과 하루 반나절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서로 준비한 자료를 발표하고 토론을 하여 갑상선암 연구에서 서로 돕기로 하였다. 일본 학자는 평생을 통해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연구에 필요한 기본 물질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갑상선의 정상세포주, 암세포주를 받아왔고, 몇 가지 실험 프로토콜을 보내주기로 하였다. 학문 연구도 유행인 주제만 쫓아서 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 학자들이 배워야 할 태도이다.

 둘째 날 오후는 시내관광을 하면서 보냈다. 나가사키시 당국은 난학의 발생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돈벌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서양식 건물과 도시 모습을 재건 복원하여 1977년 국제문화관광 도시로 선정되었다. 함께 들어온 천주교 교회와 순교지 같은 성지를 천주교 관련 세계 역사문화유적으로 인정받을 계획이란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이곳 주민 대부분은 불교와 혼합된 일본 신도를 믿고 있다. 신자가 없는 교회는 사람 살지 않는 빈 집이나 마찬가지여서 박제된 동물처럼 혼이 없었다.

 또 나가사키 항구의 밤풍경이 홍콩, 모나코와 함께 세계 3대 야경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케이블카를 타고 이나사산 정상에 올라가 시내와 항구를 둘러보았으나 그 정도의 경치는 아니었다. 선정 과정을 찾아보니 2012년에 3천명으로 이루어진 야경심사단이 나가사키 시에서 `야경 SUMMIT 2012' 회의를 하고 전 세계 40개 후보 도시를 중에서 선정하였다고 한다. 다분히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의심되지 않는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음식이 이곳에서 일본화 되었다. 포르투갈 케이크를 물엿으로 변형해서 일본인 입맛에 맞는 카스텔라를 만들고, 비프스테이크에 부드러운 나가사키 고기를 사용해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었다. 또 뱃길을 따라와 정착한 중국인들이 초마면에서 나가사키 짬뽕을 만들어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 짬뽕의 원산지에 불교 사찰이라고 오인할 것만 같은 중국풍의 5층짜리 큰 식당을 만들었고 나가사키 시가 발아래 보이는 구르바언덕 위에 서양풍 주택단지를 복원하였다. 일본식 서양식품의 발상지라는 지유테이가 있어 커피와 카스텔라를 먹어보았다. 윤 선생 말대로 대학로 `학림'과 분위기가 비슷한 이곳의 카스텔라는 빵 바닥에 자라메라는 각진 설탕을 깔아 구워내 단맛이 진하였다.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나비부인'의 가상적 무대라고 하여 작곡자와 나비부인의 조각상도 세워 놓았다.

 나가사키 시는 현재 인구 40만명의 아담한 중소도시이다. 규수의 한 구석에 있고 한적하여 학문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몇 년 후면 도쿄와 고속전철 신칸센이 개통된다. 혼슈와 규슈 사이 바다를 지하터널로 연결하여 이미 후쿠오카에는 기차가 닿았다고 한다. 이 곳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지만 부작용으로 역사적 유적은 더욱 관광 상품화 될 것이다.

 이곳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서양문명을 도입 모방하여 그 힘으로 한국, 중국,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까지 식민지로 삼아 성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운명인지 바로 이 도시에 투여한 원자폭탄을 끝으로 그들은 항복하고 실패하였다.

 이런 영욕의 역사 속에서 상품화된 유적을 구경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다. 지나간 역사에서 이익을 챙기는 것보다, 앞으로 살아 갈 방향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또, 우리도 이웃의 과거 자취와 현재의 대응에서 빛과 그림자를 찾고 배워 우리 개인과 사회의 올바른 좌표를 설정하는데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학문의 자세, 대학의 사회 참여, 역사 유적의 활용, 원자력발전소 운영, 과학 발전에서 철학의 역할 등등에서…. 

정 준 기(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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