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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무관심과 나도풍란 소심
적당한 무관심과 나도풍란 소심
  • 의사신문
  • 승인 2009.08.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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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심 꽃을 달고 있었던 나도풍란. 내년이 지나도 또 한 해가 지날 때까지 나를 애달프게 할듯하다.
병원 로비에 내가 아주 좋아 하는 찻집이 있습니다. 분위기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는 없는 색다른 차를 내는 곳도 아닙니다. 단지 재작년 늦봄 그곳 테이블에서 마주친 나도풍란 때문입니다.

그때 거기엔 탁자마다 작지만 묵직한 크리스털 유리잔에 담은 나도풍란이 한 촉씩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잎 서너 장이 고작이었지만 신통하게도 모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인에게 향을 맡아보라 했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나도풍란 역시 우리나라 남쪽 해안 및 도서지방에서 자생하는 착생란입니다. 뿌리를 바위나 나무 등걸에 붙이고 살아갑니다. 공기 중에 노출된 뿌리가 습기를 빨아들이고 질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 거름 없이도 잘 자랍니다.

잎이 좁고 뾰족한 풍란과는 달리 나도풍란의 잎은 2cm 내외로 제법 넓습니다. 풍란의 꽃은 앙증맞게 작으며 달콤한 향을 날리는 반면 나도풍란의 꽃은 보잘 것 없습니다. 오히려 모양은 피기 전의 꽃봉오리 때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활짝 피기를 학수고대하는 이유는 그 향 때문입니다. 나도풍란 꽃 향의 청신함에 견줄 만한 향은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말 그대로 청향입니다.

그날 내가 앉았던 테이블 위에 있던 나도풍란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작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꽃에 아무 무늬도 없이 희미한 녹색만 보입니다. 대부분의 난 꽃은 풍란이든, 춘란이든 또는 한란이든 꽃에 맑은 보라색 무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돌연변이가 생겨 아무 무늬가 없이 흰색 꽃이 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꽃을 소심(素心)이라고 합니다.

나도풍란 소심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 난을 억지로 배양해 꽃을 올리는 바람에 그리 되었는지 본래 변이가 나타난 것인지는 키워봐야 알 듯했습니다. 자리를 뜨며 꽃이 지면 가지러 올 것이니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습니다.

열흘 쯤 후에 기별이 와서 세 촉을 받았습니다. 남은 꽃대는 바투 잘라 버리고 흐트러진 이끼는 다시 잘 정리해 납작한 화분 위에 얹었습니다. 두 촉은 제법 튼실해 쉽게 자리를 잡을 듯했지만 소심 꽃을 피웠던 한 촉은 생각했던 것보다 약했습니다.

예상대로 두 촉은 새 잎을 계속 틔우며 크더니 1년 만에 열 송이도 넘는 탐스런 꽃을 피웠습니다. 사무실에 홀연한 향이 흘렀습니다. 본래 있었던 찻집에도 며칠 가져다 두었었고 현관 안내에도 며칠 두었습니다. 그렇게 나누며 얻는 기쁨이 내가 난을 키우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올 봄 다시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이끼로 화분을 정리해 지난해 말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동료 여직원에게 주었습니다. 3년 가까이 함께 성심껏 일해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난을 핑계 삼아 소식을 주고받는 즐거움은 덤으로 남았습니다.

사무실엔 아직 나도풍란 두 촉이 살고 있습니다. 소심 꽃을 피웠던 화분은 내게로 온 그해 여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지나도록 몹시 몸살을 앓았습니다. 만 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잎 석장뿐입니다. 그래도 올 봄부터는 아기 젖니 나듯 뿌리가 하나 둘 돋고, 새로 난 잎도 조금은 커졌습니다. 언젠가 맑은 빛의 하얀 꽃이 피면 고마운 분께 드릴 수 있겠지요.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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