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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과 노자의 무위사상(無爲思想)
헝그리 정신과 노자의 무위사상(無爲思想)
  • 의사신문
  • 승인 2014.12.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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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단상 <4>

요즈음 우리나라 프로 운동선수의 수입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프로 야구와 축구 같은 일부 인기종목의 선수들에게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을 몸값으로 외국팀 뿐 아니라 이제는 국내 팀에서도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벌 수 없는 꿈같은 액수에 청소년들은 진로를 고민하고 어른들은 허탈해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초 일류급 선수가 한시적으로 얻는 수입이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자질이 뛰어 난 선수들이 어려서부터 운동 이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꾸준히 노력한 대가이자, 치명적인 부상을 견디고 피하여 얻은 행운의 금자탑이기 때문이다.

프로 운동경기에서 실상 승리와 패배는 간발의 차이로 나누어진다. 일류 선수와 이류 선수의 실력 차이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 기본적 자질과 능력은 거의 비슷하고 자신감과 불안감 같은 정신적인 변수가 작동한다. 많은 경우 실력과는 관계없는 행운이나 불운에 의해 승패가 갈리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시기(timing)도 아주 중요하다. 경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할 때, 우연히 요구에 맞추어 활약해 일약 스타선수가 되는 것이다.

운동에 대한 모티브와 절박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문가도 있다. 굶고 있는 상태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소위 `헝그리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이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배수진을 친 태도이고, 운동의 승패에 인생의 성공 여부를 연관 지은 절박한 자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한 곳에 집중하고 초자연적 힘이 나타난다. 의학적으로는 부신피질 호르몬, 성장 호르몬이 다량 분비되고, 교감신경이 최대한 긴장한다. 실제로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오히려 차분해 지는데 옥시토신이 고농도로 증가하기 때문이란다.

현재 미국 LPGA에서 맹활약 중인 S선수는 처음에 실력은 충분하나 국내대회에서도 우승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우환이 생겼다. 사망보험금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니 500만원이 남았단다. 이 돈으로 필리핀에서 열린 골프대회에 참가해 기적적으로 우승하고, 그 후 국내 대회에서도 연속적으로 우승하게 되어서 언론의 화제가 된 바가 있다.

우리 고교 후배로 강타자였던 A는 실업야구 선수생활이 거의 끝날 무렵인 1980년도 초에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김응용 감독에게 자기도 포함시켜달라고 간청했으나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당했다. “너의 집은 돈이 있어서 안 돼!” 고된 프로선수 생활에서 성공하려면 재능이나 실력, 체력 어떤 것보다도 헝그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같이 생활이 좋아진 시대에 더 이상 밥을 굶는 선수는 없다. 오히려 대부분 선수는 충분한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운동을 배우고 있다. 학부모는 모임을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을 하면서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보조하고 있다. 어떤 부모들은 그 운동의 선진국에 조기유학을 보내 국제적 스타로 키우기도 한다. 방학 중에는 날씨가 좋은 해외에서 전지훈련도 해야 한다. 내가 한겨울에 필리핀을 방문해 마닐라 근교 골프장에 가본 적이 있다.

54홀의 비교적 큰 골프장에서 150명의 우리나라 골프선수 예비생들이 머물며 훈련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한국식당, 하숙집, 골프연습장은 물론이고 이들을 위한 영어 학원까지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지원이 없는 선수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기가 어려워졌다. 더 이상 헝그리 정신이 작동하지 못하고 효과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고교 야구 후배 B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투수였던 그는 공의 스피드는 빠르나 제구력이 떨어져 고등학교 선수시절 각광을 못 받고 있었다. 특히 일 년 후배 투수인 C선수가 더 잘 던져 선배인 그가 주로 벤치에 후보 선수로 앉아 있어야 했다. 점차 자신감이 없어져 모처럼 등판해도 실수와 불운으로 다시 투수자리를 C에게 인계하곤 했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좀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요령이 생기고 그동안 시합을 못해 싱싱한 어께가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마음고생을 독서로 달래와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점차 승리하면서 얻은 성취감과 자신감이 더해졌다. 마침내 그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대표 팀에서 강속구를 던지는 주전투수가 되었다.

나는 십 년 전 조기위암으로 위절제 수술을 받았다. 더욱이 암이 위 천정 부위에 생겨 위 전체를 제거하고 식도와 십이지장을 연결했다. 위 일부를 남긴 환자 보다 소화기능이 떨어지고 더 불편했다. 정상인과 다른 점 하나가 공복 시에 느끼는 식욕이다.

아마도 먹고 싶다는 느낌은 속이 빈 위장에서 발생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위 전체가 없는 상태라 먹을 때가 되면 배고프다는 느낌보다는 저혈당의 증세가 주로 나타난다. 맥박이 빨라지고 어지럽고 기운이 떨어진다. 즉, 더 이상 헝그리 정신이 안 생기는 것이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우리 의과대학 교수 6명이 암으로 위절제 수술을 받았다. 우리들은 재미삼아 무위(無胃)도사 클럽을 만들었다. 그러나 특별한 활동은 없고 드물게 생각나면 서로 방문하고 회복기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이다. 노자는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것”을 무위(無爲)라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무위(無爲)로서 무위(無胃)를 서로 위로하고 있다.

노자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는 삶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도덕경〉에서 “無爲 而無不爲(무위하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인위적으로 거슬러 행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듯이 하는 것이다. 나는 후배 B선수가 이 경우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지만 애써 시류를 거슬러 하지 않았다.

서둘지 말고 꾸준히 육체적, 정신적 실력을 키우고 있으면 때가 되어 자연히 빛을 보게 된다. 설령 스타선수가 못되어도 그동안 운동하면서 얻은 생각과 경험으로 만족하자. 무위사상을 따라 살면 그리 큰돈이 들지도 않는다. 수십억이나 수백억 원이 다 속 빈 위장관에서 생긴 헛된 욕망일지도 모른다.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 무위(無胃)인 우리는 “무위(無爲)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에서 인생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고 있다.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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