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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교수 10주기를 추모하며
이문호 교수 10주기를 추모하며
  • 의사신문
  • 승인 2014.12.0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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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단상 <3>

이번 12월 5일이 서울의대 내과의 청봉 이문호 교수님이 타계하신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의사와 의대 교수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화려하게 일생을 사셨다.

수많은 연구논문과 유수한 제자들, 의학회 회장에 의료인국가시험원 원장이라는 직함, 여기에 흘출한 체격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추어 의학계의 `대부(godfather)'라고 누구나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문호 교수님이 의료계에서 받아온 신망이 그를 진정한 보스로 만들었다.

1922년에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나 해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교사이던 아버지의 권유로 자유로운 직업인 의사가 되기로 한 그에게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왔다. 졸업반이 되면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것이다.

대학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인 교직원이 모두 떠나고, 소수이던 한국인 선배들은 학문의 길에서 멀어진 상태이어서 그 해 졸업생들이 대학을 지키고 키워야 했다. 선생님의 대학동기 10 여명은 일지회(一志會)를 조직하고 한국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자 다른 의학전공을 택하여 각 분야를 이끌게 된다.

이러한 숙명적인 선구자의 인연에 청봉 선생님의 높은 혜안과 실천력이 더하여 진다. 사물이나 사안의 핵심을 파악하여 적절하고 구체적인 방법과 행동으로 해결하고 성취하였다. 독일에서 3 년간의 연수로 익힌 방사성핵종을 이용한 임상진료와 의학연구로 귀국 후에 어렵지 않게 스타교수가 되고, 윗사람이 거의 없는 의학계에서 폭 넓은 인간적인 그릇과 왕성한 활동으로 중심인물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의학계의 대표가 된 그는 정부 측과 유대를 맺고 설득하여 의료인의 국가고시를 의학단체에 이관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또 각 전문학회의 분과학회협의회 회장을 맡은 후, 정식 대한의학회로 확대 승격시켰다. 이는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가 자율적 능력을 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금의 의료계 지도인사들이 배워야할 내용이다.

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자신이 학문적으로 꾸준히 변화하며 발전하였다. 독일의학을 본받던 일제시절에 의학부 학생이었던 그는 해방 후 미국의학이 주도하는 상황에서도 학창시절의 꿈을 따라 독일유학을 간다. 관심이 많은 혈액학의 대가를 찾아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일마이어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 도중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새로운 의학을 접하게 된다.

귀국 후 서울의대 부속병원에 `방사성동위원소 진료실'을 개설하고 30 대 약관에 책임자가 된다. 방사성동위원소를 가장 유용하게 쓰는 분야가 갑상선 질환이었고 신장질환에도 방사성레노그람을 사용하여 연구하였다. 그 당시 유행성 출혈열이 사회적인 이슈였고, 콩팥의 병변을 연구하다가 감염학에 관심을 두게 된다. 혈액학, 갑상선학, 신장학, 감염학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보는 팽창주의가 아니라 연구에 대한 선생님의 끊임없는 열정과 관심의 결과였다.

그 결과, 내과의 여러 전문분야에 제자들을 키울 수가 있었다. 서울의대 내과에 10 명이 넘는 직계 제자가 자리를 잡아 소위 `이문호 사단'을 구축하게 된다. 이문호, 고창순, 이정상 교수님이 주축이 되어 팽창하는 이 집단을 일부에서는 견제하여 동위방이라고도 하였다. 유수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는 또한 청봉 선생님의 보스기질이 작동하였다. 그는 항상 제자의 양성과 관리에 신경을 썼다. 망년회에서 모든 제자의 학위논문 주제를 외어서 소개하고 수련이 끝나는 제자들에게 “나의 어깨를 딛고 한 단계 더 올라가라”고 격려했다. 매년 새해 정초엔 OB까지 포함한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였다.

이문호 교수님은 개인적인 매력이 있는 분이었다. 잘생긴 용모에 큰 키와 세련된 복장을 항상 유지하였다. 능력에 대한 충실감, 자기 확신에 포용력까지 있어, 사회학에서 말하는 `이미지 관리(image management)'에 성공한 경우이다.

우리나라 의료 의학 분야의 자랑스러운 대표로 동료와 후배들이 전폭적으로 추앙하였다. 교수회의에서 인사위원회 위원을 선출할 때마다 항상 1등이었다. 한번은 주임교수 회의에서 격렬한 토의 도중에 청봉 선생님이 “내과를 제외한 기타 잡과는 조용히 하세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망언사건으로 발전될 수 있었으나 청봉 선생님이면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어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다.

내가 전공의 시절에 선생님에게 받은 인상은 매우 학구적이라는 점이었다. 진료나 연구 모임에서 최신 지견을 뜻밖에 언급하셔서 우리들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문을 중시하는 태도는 보통학교 교사였던 아버님의 영향도 컸을 것이고 학창 시절 배운 독일의학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평소에도 “다시 태어나도 의사와 의대교수가 되겠다.”고 되뇌시곤 하셨다. 즉, 어릴 때부터 대학생 사이에 만들어진 학문적 열망에 시대적 요구,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결합되어 마침내 의학을 이끌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내면적으로는 아주 자상한 성격이었다. 송년회 회식에서 애창곡으로 `나 혼자만의 사랑' `검은 장갑의 여인' 같은 서정적인 노래를 옐로우 보이스로 부르곤 했다. 제자인 최성재 선생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 울먹이시던 표정이 기억난다. 선생님의 섬세함은 사모님과 자녀에게 해외유학이나 여행 시에 보낸 편지를 보면 뚜렷하게 나타난다.

1948년 선생님이 부속병원 내과 조무원(지금의 조교) 시절에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갓 입학한 송귀순 사모님과 결혼을 했다. 뜻밖에도 연애결혼이었다. 당시 해방 후 귀국한 해외동포를 구호하고 치료하는데 이문호 선생님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 일로 부탁 차 보건부 송찬도 구호국장 댁에 자주 드나들던 이문호 선생님은 그 집 딸을 눈여겨보고 구애 끝에 결혼한 것이다.

서구적 외모의 선생님은 의외로 전형적인 북방계 미인인 사모님을 열렬하게 사랑했다. 외국 여행 중 수시로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속에 있는 사모님에 대한 애정고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님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홀로 된 시아버지와 미혼의 누이가 넷이나 있는 가정을 아무 불평 없이 원만하게 꾸려가던 사모님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으리라.

하여튼 사모님은 경제적인 능력도 발휘하셨고 3남 1녀의 교육 뿐 아니라 제자들의 관리도 탁월하였다. 우리들이 정초에 세배 차 댁에 가면 우리를 맞이하는 사모님의 접대나 음식에서 최상의 성의를 느껴 황송스러울 정도였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정성에서 우리들은 제자로서의 자부심까지 느꼈다.

특이하게 이문호 사단은 교수 부인끼리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다져왔다. 처음에는 위 사모님이 어려웠으나 30년 넘게 부부동반 식사, 여행 등으로 소통과 우의를 다져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문호, 고창순 두 분 교수님이 타계하신 지금도 위 사모님들이 모임에 나오신다. 가끔 우리들과 식사도 하셔서 반갑고 안심이 된다.

이문호 교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사모님의 선생님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경기도 곤지암에 일층 벽돌집을 짓고 조그마한 선생님의 개인 박물관을 만드신 것이다. `청봉사랑방'이라고 명명된 이 집에는 선생님의 모든 유품이 정리되어 있다. 흉상, 훈장, 문방구, 수첩, 여권, 편지, 신문 스크랩, 학사 서류(졸업장, 학위기), 감사패, 직원증, 책, 기증물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배치되어있다. 선생님의 숨결이 어린 유품들을 보면 사모님의 정성이 아니, 두 분의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느낄 수 있다.

이번 10주기를 맞이하여 사모님은 중요한 결심을 하셨다. 선생님의 유물을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에 박물관 측은 조그마한 특별 전시공간을 내어 선생님 유품을 수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다. 제자들은 사모님의 뜻을 기리고자 간단한 행사를 갖고 유품 도록집을 발간한다. 이를 위한 제자들의 성금이 쇄도하여 남은 금액을 박물관 발전에 기부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안 계신 지금도 계속되는 `진정한 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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