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학의 갈래
인문의학의 갈래
  • 의사신문
  • 승인 2014.12.0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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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익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강신익 교수
의학 자체가 인문학적 문제의식·방법에 기초

“의학은 과학이지만 동시에 인문학이기도 하다!”

2004년 인제의대 인문학 전임교수가 되면서 만든 교실에 의료인문학 대신 인문의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이유다.

의료인문학이라 하면 왠지 의료를 `위한' 또는 의료에 `관한' 인문학인 듯하지만, 인문의학이라는 말 속에는 의학 그 자체가 인문학적 문제의식과 방법에 기초해야 하며 따라서 인문학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과학이 의학을 지배하여 인간의 몸이 과학적 사실로 환원되기 시작한 최근 몇 백 년을 제외한 전 시기에 걸쳐 의학은 자연(과학의 대상)과 인간(인문학의 대상)에 동등한 무게를 부여해 왔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보더라도 의학에는 과학에 해당하는 하늘의 무늬(天文)와 땅의 이치(地理), 그리고 인문학에 해당하는 인간의 무늬(人文)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이후 과학의 대상은 자연과 사회로 분리되었고 각각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되었다. 의학을 사회과학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세포병리학의 아버지이고 사회의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루돌프 피르코(Rudolf Virchow)의 공헌이 컸다.

그는 국가가 개인들의 공동체이듯이 우리의 몸도 세포들의 민주공화국이라 생각했다. 이후 건강을 위해서는 몸이라는 자연뿐 아니라 그 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 환경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싹트고, 보건학, 역학(疫學), 의료사회학, 의료법학 등 질병과 건강의 사회적 요인을 연구하는 학문들이 생겼다.

의학이 질병과 건강을 경험하는 주체인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은 무척 뿌리가 깊지만, 의학이 온전한 과학이 된 이후 거의 무시되어 왔다. 과학적 방법론이 모든 학문을 지배했고 인간이해를 위한 학문도 인문`과학'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진다. 과학이 대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인문학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비판적 성찰이라는 자각이 깊어진 탓이다.

이렇게 보면 의학은 주로 관심을 쏟는 대상에 따라 자연인 몸을 다루는 자연의학, 그 몸들이 모여 구성된 그리고 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의학, 그리고 질병, 고통,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성찰인 인문의학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의학의 발전 과정을 해석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일 뿐이고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학 자체를 어떤 틀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발전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난 10여 년간 의학교육인증평가가 각 대학의 교육을 얼마나 바꿨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제 평가원은 의학을 기초의학, 임상의학, 의료인문학으로 분류하는데, 평가를 준비하는 대학은 이 분류체계에 바탕을 둔 기준에 따라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그 결과 인문학이 의학교육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문의학의 교육과 연구에 관한 합의된 기준이나 표준 교과과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자격을 평가하는 국가시험에도 인문학 과목은 아직 없다. 일부 인문학자는 그런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지식체계가 오히려 인문학의 성찰과 비판 정신을 훼손할 것이라 걱정한다. 의학에 필요한 인문학은 사태를 바라보는 성찰적 태도이지 객관적 사실로 구성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대상에 관한 지식과 이해도 없이 성찰적 태도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의학과 관련된 인문학은 지식과 태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과 태도는 특정 시기와 환경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생성된다. 인문의학의 다양한 갈래들은 그런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다.

가장 오래된 갈래는 의학과 의료의 역사를 연구하는 의사학(醫史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 서울대에 의사학 교실이 설치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한의사학회도 창립되었다. 1996년에는 연세대에도 의사학과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의료제도의 전개과정이 주 관심사였고 발전사관에 입각해 있었으며 원로 의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2000년대 이후 전문 역사학자의 참여가 많아지면서 연구 영역이 다양해졌다. 제도를 넘어 의학 사상을 연구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의료공급자가 아닌 환자의 질병경험을 중심에 두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번역 소개된 책들도 많고 국내 저자에 의한 저작도 여러 권 출판되었다.


인문의학 범주에 의사학·의료윤리·의료문학 모두 포함
과학적 방법론만에서 벗어나 종합적 인간 이해로 합류


1997년에 환자 보호자의 요구로 퇴원시킨 환자의 사망에 대해 관련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보라매병원 사건은 의료계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도 의학, 의료, 의사의 정체성에 관한 심각한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2006년에 있었던 줄기세포 조작과 난자 채취에 관한 윤리적 위반사례는 전 국민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례들은 모두 의료실천에서의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이었고 1997년 말 의료윤리교육학회와 한국생명윤리학회가 창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위의 세 사건은 각각 임상윤리, 사회윤리, 연구윤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중 연구윤리의 문제는 연구의 내용을 사전 심의하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 가고 있다. 임상윤리에 해당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지에 관한 논의는 2008년 대법원 판결로 그것을 허용하는 쪽으로 큰 방향이 결정되었다. 파업을 계기로 불거진 의사의 사회적 책임과 권리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직업전문주의(Professionalism)가 그 지향 점이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이처럼 의료윤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새로운 관행과 절차를 마련하는 것을 그 소임으로 한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기술과 생명유지기술 등이 야기하는 인간 정체성과 생태적 균형의 문제를 사회적 합의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유전학, 면역학, 신경과학, 로봇공학 등의 발전에 따라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물질과 생명, 자아와 타자,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생명과 기계의 경계 문제 속에는 인간 존재와 지식의 본질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의철학(醫哲學)은 이런 물음에 답하려는 학술적 노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의사, 한의사, 철학자, 인류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만든 한국의철학회가 이런 문제들에 관한 학제적 연구를 하고 있다.

건강과 질병은 인간 경험의 가장 원초적 차원에 자리한 문제이고 예술 작품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작품들에는 의료적 경험을 다루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며, 의사이면서 동시에 문인인 사람도 적지 않다. 문학은 과학적 의학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인간경험의 내면을 읽어내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2010년에 창립된 의학문학회는 의학과 문학의 가교역할을 하려는 의사와 문인들의 모임이다.

질병과 의료경험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문학의 표현양식을 빌어 임상에 활용하려는 노력도 있다. 질병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 환자의 경험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움으로써 생물학적 치료를 넘어 인간적 치유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틀어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 한다.

의학과 의료를 문화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의료인류학(Medical Anthropology)도 인문의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아직 학회가 구성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과정 중에 있는 전공자는 여럿 있다.

지금까지 인문의학의 여러 갈래(分流)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의학과 의학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메타적 이해를 지향하는 것들이다. 인문의학의 여러 분류들은 종합적 인간이해로 합류(合流)한다. 과학적 방법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상 그대로의 건강과 질병을 인간이해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의학 그 자체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고 주류의학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익숙한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인문학의 숙명이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펴낸 인류학 입문서의 제목이다. 의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원리는 불편함의 교육학(Pedagogy of Discomfort)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학생들을 정서적으로 불편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낯설었던 외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몰랐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듯이, 인문학으로 의학을 대상화하고 그것에 낯설어지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운 의학의 길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강신익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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