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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철학을 말한다
의철학을 말한다
  • 의사신문
  • 승인 2014.12.0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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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석 <연세의대 의사학과 교수>

여인석 교수
의학에서 철학을 빼면서 `반성'의 능력 상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의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철학은 의학의 자매이며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 철학은 영혼으로부터 정념을 제거하고 의학은 육체의 질병을 제거한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전문적인 의사는 아니었지만 인체의 생리나 병리와 같은 의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탐구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들의 자연철학적 이론이 의학에 적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의학의 입장에서 철학과의 밀접한 관계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들어있는 글의 하나인 `고대의학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의학은 철학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것은 의학이 사변적 거대이론의 적용분야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원리를 가진 독립적인 분야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후 의학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아 철학적 색채를 가능한 지우는 방향으로, 대신 과학의 모습을 취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의학은 과학의 한 분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의학에서 철학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긍정적인가? 의학이 철학의 구속에서 벗어난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은 철학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과학이라는 또 다른 족쇄에 자신을 더욱 강하게 얽어매었다. 물론 그로부터 얻은 긍정적인 결과도 있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반성'의 능력을 상실하고 앞만 보고 나아가게 된 점이다.

과거의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지식을 의미했다. 그것은 자연학을 포괄하는 넓은 학문이었다. 그러나 분과학문들이 발전하며 떨어져 나간 결과 철학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무엇을 철학의 영역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반성적 사고, 현상의 근저에 있는 본질에 다가가려는 근본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의학에서 철학을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능력이고 의철학은 바로 이런 역할을 자임하는 학문이다. 흔히 철학은 골치 아픈 것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복잡한 생각을 하는 활동쯤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의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결코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의학은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절박한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의철학은 다른 어떤 철학보다도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고민하는 학문이 되는 것이다.


의철학은 `생로병사' 인간의 보편적 문제 고민하는 학문
생명윤리 등 철학적 사유 필요한 경우 많은 `불가분 관계'


의철학이 다루는 주제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의료의 현장에서 다양하게 부딪히는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들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해 어디까지 연명치료를 해야 하는가, 고통스런 상황에 처한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의사는 도울 수 있는가, 낙태는 허용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는 인간과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이다.

이런 윤리적 문제들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가지는 문제이므로 크게 부각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의료윤리, 혹은 생명윤리는 의철학 일반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큰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때 서양에서 의철학을 표방하고 창간된 학술지들이 지금은 거의 생명윤리 학술지로 성격이 바뀐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문제들 이외에도 의학에서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많다. 어떤 학문의 성격은 그 학문이 어떤 문제를 갖고 고민하는가에 의해 규정되므로 의철학이 다루는 대표적인 문제들을 한두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의철학의 주제 중 하나는 의학이라는 학문의 성격 규정에 관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의학은 과학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학 깊숙이 들어온 과학은 의학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일부에서는 의학은 과학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또 과학은 무엇인가?

사실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과학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의철학은 과학철학적 주제까지도 포괄하여 의학의 성격을 규정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질병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질병의 존재론적 지위를 묻는 물음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기준에 의해 질병인 것과 질병 아닌 것, 달리 표현하자면 정상과 병리를 구별하는가라는 가치론적 물음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생명·질병·의학은 의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대표적인 세 가지 주제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적 통찰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한국에서는 약 8년 전에 한국의철학회가 창립되어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다.

여인석 <연세의대 의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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