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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 - 질병과 이야기 그리고 의료인문학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 - 질병과 이야기 그리고 의료인문학
  • 의사신문
  • 승인 2014.12.0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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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임경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황임경 교수
이야기를 매개로 환자와 의사를 다시 이어야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 이후 의학에 인문학적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의학계 안팎에서 등장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의사들은 의료인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낯설어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많은 의료인들이 인문학 공부의 중요성을 외치고 있고,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에서도 형식적이긴 하지만 의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의료인문학에 대한 고민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의사들에게 동서양의 고전을 읽도록 하는 정도라면 굳이 의료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내걸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어느 노(老) 의사의 말처럼 인간적이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는 의사를 길러내는데 인문학이 어떤 역할이든 해야만 의료인문학의 존재가 정당화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좋은' 의사를 길러내는데 의료인문학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을 요구하지만, 이것은 공학적으로 접근하여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의료인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의학이 가지고 있는 인문성을 은폐하고 있기도 하다. 의학과 의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필자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환자와 그것을 도와주려는 의사의 치유적 만남에 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술의 힘을 빌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읽어내려는 의학이야말로 진짜 인문학이자 인간학이 아닌가?

의학과 인문학을 분리해서 의학이 인문학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무엇을 배우거나 도입하는 방식으로는 의학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인문성이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의료인문학은 의학과 인문학의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상호 구성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 나가야 하며, 의사의 전 일생에 걸쳐 지속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는 분야이다. 서사의학은 이야기 행위를 의료의 본질적 특성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의료행위나 의학교육에 이야기를 적용하려는 학문적, 실천적 흐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서사 또는 내러티브(narrative)는 거칠게 말하자면 구조화된 방식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사를 통해 삶에 필요한 지식과 세상살이의 방식을 배우고,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지혜를 서사를 통해 전달함은 물론이며,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상처와 감정들을 서사를 통해 재구성하고 처리하게 된다. 서사는 언어와 더불어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인간의 활동인 의학과 의료 또한 이야기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의학에도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 이야기를 통해 환자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서사적 전통'이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의학이 질병과 그것을 앓는 사람을 자꾸 분리해서 보려고 노력하면서, 이야기는 의학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서사의학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질병은 생의학적인 실체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이자 사건이기도 한데, 그 의미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사의학은 의료인문학이 추구하는 의학의 인간적인 차원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대의학, 질병과 환자 분리하면서 소통과 감정 표현 배제
의학이 본래 가진 인문성 `치유적 만남'의 의미 되새겨야


사실 병원에는 환자와 의사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병원에 오면 환자는 질병의 원인, 전개 과정, 치료나 질병 경험,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등과 같은 질병에 관련한 모든 것을 말이나 글로 풀어내게 되는데, 이것을 질병체험서사 또는 질병체험이야기(illness narrative)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질병에 대한 환자의 이야기이다.

환자는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몸과 마음의 경험을 재구성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환자의 가치관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배경 등 환자를 구성하는 내적, 외적 상황 모두가 총체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의 질병체험서사를 통해 환자나 주변 인물에게 있어서 질병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환자의 생활 세계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환자 이야기가 소외되고 있다. 의사는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환자의 이야기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생의학 언어로 바꿔놓아야만 비로소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병력(medical history)으로 대표되는 의사의 이야기는 사실 환자보다는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 간의 소통을 위한 서사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주관적 감정 표현이 철저히 배제된다는 점이다. 당직 보고를 하는 전공의는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밀어닥치는 환자를 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수도 있고, 피곤함에 지친 나머지 신경이 곤두서서 환자 보호자와 크게 싸움을 벌였을 수도 있다. 말기 암 환자를 담당한 여린 주치의는 환자의 딱한 사정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개별적 상황과 감정은 의학적 서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대의학에서 의사의 주관적인 이야기 또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서사의학은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환자와 의사 사이의 잃어버린 끈을 다시 잇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의사는 환자의 질병체험이야기나 의사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잘 듣고, 그것을 삶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환자의 상황에 공감하고, 환자를 위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고자 한다.

실제로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의 샤론(R. Charon)같은 내과의사는 의과대학생이나 의료인들에게 집중적인 책 읽기와 글쓰기 과정을 통해 의학과 의료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배울 수 있는 모범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다른 연구자들도 의료차트에 이야기 요소를 도입하는 등 의료현장에서 실제로 서사의학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의학에서의 이야기라는 주제가 매우 낯설지만, 최근 불고 있는 스토리텔링 열풍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많은 의료인과 환우들이 관심을 두게 된다면 현대의학이 좀 더 따뜻해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철학자 이정우는 “인간의 삶은 몸을 통한 겪음 즉, 체험(體驗)의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언어를 통해 체험들을 개념화하고, 글쓰기를 통해 체험들을 반추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어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다. 몸을 통해 질병이라는 삶의 사건을 겪게 되면 이야기 본능은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의료인문학이 의학이 본래 가진 인문성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이야기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황임경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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