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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라벨 〈밤의 가스파르〉
모리스 라벨 〈밤의 가스파르〉
  • 의사신문
  • 승인 2014.09.1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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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280〉

■차가운 음색, 어두운 정열, 몽환적인 분위기를 난해한 음악으로 표현

19세기 리스트로부터 시작된 기교주의는 라벨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20세기 초반까지도 유행하였다. 라벨은 발라키레프가 코카서스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이슬라메이〉를 듣고 그의 친구인 모리스 델라쥐에게 〈이슬라메이〉보다 연주하기 어려운 곡을 작곡하겠다고 말하였다.

라벨의 피아노음악은 어느 곡이나 어렵지만, 특히 〈이슬라메이〉의 기술적 수준을 능가하는 곡은 훗날 작곡한 〈라 발스〉를 제외하고는 〈밤의 가스파르〉 밖에는 없다. 이 〈밤의 가스파르〉는 끝없는 아르페지오를 비롯해 억센 악센트와 집요하게 교차하는 양 손가락의 움직임, 황당한 양손의 상승 아르페지오 등 기술적으로 리스트를 능가하는 참신함과 난해함이 있다. 이 곡의 난해함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음악 해석의 난해함 때문이다.

라벨의 초기 작품 대부분을 초연한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빈스는 라벨이 10대 때 사귄 친구로 대단히 말끔하고 화려한 기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라벨이 피아노작품을 작곡할 때 가장 많은 조언을 한 연주자였다. 훗날 20세기 초 가장 뛰어난 명 피아니스트가 되는 그는 풍부한 문화적 식견을 가진 피아니스트로 베르트랑의 산문집 〈밤의 가스파르〉를 라벨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라벨은 이 산문집에서 3편을 선택하여 1908년 여름 일련의 소나타형식의 피아노곡을 작곡하게 된다. 〈밤의 가스파르〉의 각각의 곡은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음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히 나타나는 곡이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이 곡에서 라벨은 차가운 음색과 어두운 정열, 몽환적이면서 괴기적인 분위기를 난해한 기교로 음악적으로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는 프랑스 낭만파 시인 알로와쥬 베르트랑의 몽환적인 산문시집이다. `가스파르(Gaspard)'는 원래 `왕실의 보물을 담당하는 자'라는 페르시아어에서 파생한 말로 프랑스 은어로 `생쥐'라는 뜻으로 사용하다보니 일본에서 `교활한 자'라고 잘못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밤의 가스파르'는 `밤의 보석과도 같은 것들'이라는 의미로 마치 어둡고 신비스런 보석과도 같은 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곡: 물의 요정(Ondine) 옹딘은 인간 남자의 사랑을 잃고 결국 그 남자의 죽음을 지켜봐야하는 전설속의 요정이다. 트레몰로로 밤의 섬세한 풍경을 표현하고 왼손의 선율은 아르페지오, 오른손은 기교적인 변화를 주면서 호수 위에 파문이 번지는 듯 회화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곡의 화성 구조는 드뷔시의 음악에 비해 훨씬 가지런하다. 선율적으로 단조로움을 느끼기 쉽지만 라벨의 기법 자체가 교묘하여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른 박자로 적절히 엇갈리고 있어 섬세한 변화를 연출한다. 이어서 `요정은 샐쭉해져 투정부리고 조용히 울고, 갑작스레 소리 내어 웃고는 물방울이 되어 나의 푸르스름한 창문을 타고 하얗게 흘려 내려서는 흩어져 버렸다'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유리에 부딪혀 색색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의 효과와 요정이 흘리는 눈물 등의 다양한 회화적 이미지가 변화무쌍하게 나타난다.

△제2곡: 교수대(Le gibet) 해질 무렵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를 황량하고 엄숙하게 묘사한 곡이다. 제1곡의 관능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돌변하여 죽음을 암시하는 음울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리듬은 쉴 새 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곡 자체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어 놀랍다. 이는 시에서 `성벽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와 바람에 흔들거리는 죄수의 시체'를 표현한 것이다. 집요하게 울려대는 종소리는 최면적인 효과까지 일으키며 공포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3곡: 스카르보(Scarbo) 역사상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스카르보'는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조그마한 요정이다. 이 곡에 등장하는 격렬한 악센트, 숨 가쁜 질주, 극적으로 고조되는 악상은 사람을 놀리려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한없이 커지는 요정의 모습으로 그 장난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덤덤할 뿐이다. 고도의 기법과 극단적인 감정표현을 요구한다.

■들을만한 음반: 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DG, 1974); 이보 포고렐리치(피아노)(DG, 1982); 상송 프랑스와(피아노)(EMI, 1967)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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