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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이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27
이자이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27
  • 의사신문
  • 승인 2014.03.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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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255〉

■근대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 작품의 정수

이자이는 1923년 어느 날 요제프 시게티 연주회에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고 그에 못지않은 작품을 쓰기를 강렬히 원했다. 그날 밤 북받치는 감동으로 들뜬 상태에서 하룻밤을 세워 대부분의 스코어를 완성하게 된다. 이 작품이 바로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27이다.

이 작품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파가니니의 〈24곡의 카프리스〉와 더불어 최고의 3대 무반주 바이올린독주곡으로 손꼽힌다. 이 곡은 연주자에게 마치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처럼 악몽과 같은 경험과 함께 끝없는 환의의 도취를 모두 건네준다. 그는 이 작품 속에 바로크뿐만 아니라 후기낭만주의와 새롭게 발견된 민속 음악의 전통까지 사이사이 꼭꼭 채워 넣었다. 무엇보다도 찬연히 빛나는 테크닉으로 무장한 마력적인 음색으로 호흡과 활사이의 새로운 긴장을 촉발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자이는 이 여섯 곡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당대 명 바이올린니스트 여섯 명에게 각각 헌정하였다. 바흐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을 반영한 제1번은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요세프 시게티에게, 바흐의 파르티타 전주곡을 인용한 제2번은 1953년 불의의 비행기사고로 숨진 거장 자끄 티보에게, 즉흥적인 악상이 두드러지는 발라드풍의 제3번은 루마니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게오르그 에네스쿠에게, 바흐의 엄격한 대위법과 수사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곡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제4번은 프리츠 크라이슬러에게, 프랑스 스타일인 제5번은 이자이의 제자이자 그의 사중주단의 멤버인 마티유 크릭붐에게, 스페인 선율이 녹아있으면서 기교적으로 상당히 난해한 제6번은 스페인 명바이올린니스트 마누엘 쿠로가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테크닉적으로 너무 난해하면서 이질적이고 현대적인 감각 때문에 한동안 연주되지 않다가 1950년대 이후에야 많은 연주가들이 앞 다퉈 도전하고 있다.

리에주 음악원 주임교수였던 데지레 헤인베르크는 어느 날 자신의 클래스의 한 학생의 부모를 불러 “이 소년에게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을 계속한다는 것은 시간낭비하고 무의미하다.”며 연주자 포기를 충고하였는데 그가 바로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이자이이다. 그는 1858년 벨기에 리에에서 태어나 아미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후 브뤼셀음악원에 입학하여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비에냐프스키에게 지도를 받고 파리에서 비외탕의 후원으로 연주가 길을 걸으며 미국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통해 그들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다.

그 후 러시아와 북유럽에서 안톤 루빈슈타인과 연주여행을 했고, 파리에선 드뷔시, 포레, 쇼송, 생상스, 프랑크 등과 친교를 나눴는데 프랑크는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자이의 결혼선물로 헌정하였다. 쇼송은 시곡과 바이올린협주곡을, 드뷔시는 자신의 현악사중주를 헌정하였으며 이자이의 연주를 듣기 위해 독일에서 리스트, 요아힘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자이는 브뤼셀 왕립음악원 교수시절 자신의 이름을 딴 사중주단을 구성하였고 지휘자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는 톤의 강렬함과 지속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동시대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음악학자 마르크 패슈를은 “이자이는 순수하면서도 고도로 진화된 사운드와 빛나는 광채의 톤을 가진 연주자이다”라고 그의 연주를 극찬하였다.

파가니니 출현 후 로드, 크로이처, 사라사테, 그리고 독일의 요아힘 정도만 그들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갔을 뿐 대다수 연주자들은 그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자이는 그만의 필살기인 톤의 강렬함으로 20세기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윌리엄 프림로즈, 나단 밀스타인, 야사 브로드스키, 루이스 페싱어 등이 그의 제자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크라이슬러는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 나의 우상은 요아힘도, 사라사테도 아닌 바로 이자이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인 칼 플레쉬 역시 “내 일생을 통해 들었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 이자이가 가장 훌륭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말년에 당뇨로 극심하게 고생하여 육체적으로 허약해지면서 자괴감에 빠져 티보, 크라이슬러, 에네스쿠 등 동료들의 우정에 정신적으로 의지했고 당뇨로 왼발을 절단하고 그 후유증으로 1931년 사망하였다. 1937년 그를 추모하여 이자이 국제 콩쿠르가 창립되었고 1951년부터는 퀸 엘리사베스 콩쿠르로 바뀌어 명실공히 현재 최고의 콩쿠르가 되었다.

■들을만한 음반: 기돈 크레머(바이올린)(Melodiya, 1976); 오스카 셤스키(바이올린)(Nimbus, 1982); 크리스티앙 짐머만(바이올린)(EMI, 1994)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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