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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의료인문학 지평 넓히기 - 건강한 미래 한국의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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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4.01.0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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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광호 <가톨릭의과대학 명예교수, 예방의학>

맹광호 가톨릭의대 명예교수
의학, 과학 넘어 `치유의 예술행위'로 인식해야

뉴욕타임스 온라인 판 `오피니언'란에는 매주 미국의 주요 사회문제에 대한 저명인사들의 진단과 해법을 제시하는 칼럼이 한 편씩 실린다. 신문의 위상에 걸맞게 여기 실리는 칼럼 내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013년 9월 18일자 신문에는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데이비드 본스타인의 `의학의 의미 찾기(Medicine's Search for Meaning)'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이 신문 칼럼의 고정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2008년에 `달라지는 세계'(How to Change the World)라는 책을 출판한 일이 있는데 이 책은 한글을 포함해서 20여개 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본스타인은 “지금 미국의 의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로 그의 칼럼을 시작한다. 언뜻 보기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수명이나 영아사망, 그리고 모든 만성질환의 발생위험 요인인 비만 비율 등에 있어서 미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든지, 무엇보다 아직도 의료보험을 갖고 있지 않은 미국인이 5000만명에 이른다든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곳에서 미국의료의 위기 이유를 찾고 있었다.

즉, 그가 보는 미국의료 위기의 핵심에는 상호 신뢰를 잃고 있는 의사-환자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급증하는 의료비만 해도 늘어나는 의료관련 소송과 이에 대비한 의사들의 `방어적 진료'와 무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들이 스스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 조사에 의하면 미국 의사의 절반이상이 `정서적 탈진'과 `낮은 성취감',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등으로 `소진'(burnout)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과중한 진료, 그리고 교육과 연구 압박 속에서 의사들은 항상 스트레스에 쌓여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런 상태에서 환자와의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느끼는 소진상태와 이로 인한 낮은 직업만족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다. 2008년 가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의사회 총회 특별 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만족도는 북미, 유럽, 아시아 지역 13개국 의사들 가운데 밑에서 두 번째인 12위였다. 의사직에 대한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전체 조사대상 의사들의 56%가 `긍정적'으로 대답한 반면 우리나라 의사들 가운데는 단 5%만이 긍정적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위기 상태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지난 12월 15일 여의도 문화마당에는 추운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2만 명이 넘는 전국 개원가 의사들이 시위 모임을 가졌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원격의료와 영리병원제도 도입, 그리고 낮은 의료수가 체계 등 의사들의 진료 활동을 제한하는 정부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로, 지난 2000년 전국적인 의사 파업사태로 나타났던 소위 `의료대란' 이후 두 번째 의료계의 대규모 장외 투쟁인 것이다.

문제는 현재 상황에서 이런 의사들의 불만과 이로 인한 의사-환자 관계의 악화는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다소 생뚱맞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본스타인은 놀랍게도 그의 칼럼에서 결국 의사-환자 관계 악화로 나타나는 최근 이런 의료위기 상태가 의외로 멀지 않아 극복될 수도 있는 희망이 보인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 미국의 많은 의과대학들에서 의학의 본질과 그 의미를 살려 학생들을 교육하려는 새로운 노력들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의학을 단지 `과학'으로만 보지 않고 치유의 `예술행위'로 보는 인문학적 교육에 대한 노력인데 이를 통해 의사-환자 관계가 개선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정책변화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료에서 악화된 의사-환자 관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요한 의료윤리문제로 인식되어 왔으며 그 해결을 위해 많은 대학들에서 여러 형태의 의료인문학 교육과정을 운영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의과대학들이 노력해 온 일은 가령 주로 의사가 환자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정도의 원칙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교육을 해 온 것이 전부다.

그러나 본스타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환자는 왜 의사를 찾아오는지 그런 환자에게 의사는 무엇을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 등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의학교육이 출발해야 한다는 일부 의학교육계의 인식과 노력이다.

이런 노력의 한 가지 예로, 그는 지난 수년 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의과대학 레멘 교수가 주도하는 `치유자의 예술'(the Healer's Art)이라는 과목을 소개하고 있는데, 본스타인은 이 과목을 그동안의 미국 의학교육 체제를 `전복시킬만한'(subversive) 새로운 교육과정이라고까지 소개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 또한 그동안 악화된 의사-환자 관계를 개선해 보기 위해 많은 의과대학들이 시도해 온 여러 형태의 의료인문학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환자의 고통·외로움 진정으로 경청하고 이해하는 교육 필요
문학과 의학, 인간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는 공통점 주목을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 이 과목은 의사-환자 관계에 관한 이론교육보다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경험한 `생명체험'이나 `아픔', 그리고 `상실' 등을 기억해내고 이를 성찰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의사들은 자기 치유를 경험하고 동시에 환자들의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공포감을 없애주는 일에 적용하는 실질적인 기술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환자는 질병으로 인한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공포감' 등을 가지고 의사를 찾아온다. 그렇지 않고는 환자가 의사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의사의 임무는 이것들을 해결해 주는 일이고 그래야 의사는 환자들로부터 신뢰를 받게 된다. 전염성 질환이 많던 예전에는 그나마 의사들이 항생제나 해열제 등을 사용하여 곧장 육체적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병으로 인한 환자들의 고통을 쉽게 해결해 주었고 그래서 의사는 환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만성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요즘의 환자들에게는 약 보다 마음의 위로와 격려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금 의사들은 그럴 여유와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엄청나게 많은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사용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지식과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치유자의 예술' 교육과정이 포함하고 있는 교육적 원리와 운영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가령 의사와 학생들이 그룹별로 둘러앉아 과거 어린 시절에 처음 `생명체'를 보고 느꼈을 때의 경험이라든지, 크고 작건 몸이 아팠을 때 겪었던 아프고 외롭고 무서웠던 기억들을 더듬어 글로 쓰고 토론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의 반복 학습을 통해 환자의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공포심을 진정으로 경청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며 이를 통해 환자와의 사이에 신뢰를 구축해 가는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 교육과정을 거친 학생들과 의사들의 95%가 그들의 학습결과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와 함께 신경정신의학의 선구자인 칼 융은, “의사는 그 스스로 병에 걸려 보아야 다른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즉, 상처받은 의사라야 환자를 치유한다. 의학이 과학이지만 치유는 예술이고, 과학은 생각에서 나오지만, 예술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오죽하면 “의사는 스스로 죽지 않을 만큼 아파봐야 환자를 제대로 이해 할 줄 안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본스타인이 극찬하고 있는 `치유의 예술' 교육 프로그램과 유사한 것이 바로 독서와 글쓰기를 이용한 의료인문학 교육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우리가 충분히 많은 사람을 알 수 있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 엘리엇의 말처럼, 이런 문학 활동은 글을 통해 우리가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매우 효과적인 교육방법이다.

질병과 마찬가지로 원래 `고통'에서 출발하는 문학은 그 형태야 어떻든 의사들에게 필요한 `인간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생활 속 경험들을 잘 다듬어진 언어로 표현하는 수필은 그만큼 자기 성찰과 고백을 반복 학습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내에서도 일부 의과대학들이 `문학과 의학', `의학과 글쓰기' 등 과목을 개설하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특히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문학모임을 만들어 함께 좋은 글을 읽고 쓰는 활동을 하는 것은 환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하는 `의학의 의미'를 가장 잘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의과대학교육에서 생애교육으로 이어지는 전반적인 의사양성과정에 이런 인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일이야 말로,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지금 위기에 처한 우리의 의료현실을 타개하고 장차 건강한 미래 한국의료를 세우는 일에 중요한 하나의 해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맹광호 <가톨릭의과대학 명예교수, 예방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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