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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수필 - '응답하라, 1990'
기념수필 - '응답하라, 1990'
  • 의사신문
  • 승인 2013.12.0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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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희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김숙희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내 생애 가장 용감했던 날들…그날의 열정 떠올라

올해 케이블 TV에서는 `응답하라 1997, 1994' 등 현재와 90년대를 오가는 드라마가 흥행이다. 90년대 초에 대학에 들어가는 20세 전후 연령이면 지금 40세 전후이고 그 두 연령대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20대 전후의 선택과 열정이 40대 전후인 지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대는 88올림픽 이후 경제 호황으로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갈 것 같은 희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 기대와 희망은 1997년 말 IMF 사태로 인해 그만 깨어지고 말았다. 의료계도 90년대의 호황에 같이 묻어가다가 경제 불황의 타격과 함께 의약분업 등 각종 의사들을 압박하는 정책들로 인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좌절 속에 빠져들고 있다.

더구나 요즘은 업종과 나이에 관계없이 삶이 너무 팍팍한 채 희망과 의욕이 사라져버린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나도 의사로서의 1990년대를 되돌아본다.

1990년, 필자는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했다. 요즘은 전공의를 끝내고 펠로우를 많이 하지만 필자는 당시에 생소했던 모교 대학병원의 1기 펠로우를 했다. 그 후 1년 동안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연수까지 갔었다.

귀국 후에도 모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고 산부인과 전문병원에 2년 정도 봉직을 했다. 개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모교가 아니라도 종합병원에 취직해서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동기생들보다 개원도 늦은 나이이니 안 되면 관두자 하는 마음으로 일단 개원을 결심했다. 그것이 1990년도 4월 1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겁이 많아선지 은행이건 친인척이건 돈 빌리는 것을 무서워했다. 빚지지 않고 개원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림 전철역 근처 골목 안 허름한 건물 2층을 전세로 빌렸다. 보통은 건물주가 병의원에 전세 임대는 놓지 않을 텐데 재수가 좋았다.

당시 산부인과 개원은 분만이 당연했기 때문에 입원실 5개와 수술실까지 만들고 간호조무사 2명을 데리고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접수대 뒤에는 다양한 약이 든 갈색병들이 옹기종기 진열되어 있었다.

1972년 자영업자 의료보험을 시작으로 1989년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작되었으므로 개원 첫해는 보험 수가 등을 계산하고 수기로 보험 청구를 해야 했다.

진료만 하면 되던 품위있는 의사로서의 시절은 지났다. 보험청구도 해야 했고, 수지타산을 맞추어 경영도 해야 했고, 직원 관리도 해야 했고, 시설 관리는 물론 입원환자 식단까지 모두 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개원 첫 달 제왕절개를 포함해서 분만 3건에 부인과 개복 수술을 2건 했고, 이후 투자비용에 비해 외래도 입원환자도 꾸준히 늘었다. 내 생애 가장 용감하고 겁 없이 환자를 진료했던 시기였다. 간호조무사 한명을 데리고 제왕절개는 물론 부인과 개복수술을 했다. 내 가운과 발 등에는 항상 핏자국이 있었고 내 머리는 수술 모자로 엉클어졌다.

하루 이틀 밤을 새워도 다음 날 하루 잘 자면 거뜬히 하루를 버텼다. 분만을 기다리면서, 환자를 기다리면서, 내 생애 가장 책을 많이 읽고 비디오로 영화도 많이 본 시기였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책과 비디오 대여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고전부터 현대소설, 경제와 철학 심리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무차별하게 읽었고 읽은 것만큼 그전의 과거 기억들을 잊어버렸다.

내 생애 가장 닭튀김과 피자를 많이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 내 하복부 지방은 아마 그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개원이 자리 잡히면서 예금도 늘어났고 운이 좋은지 투자도 잘해서 점차 먹고 살만하게 되었다.

개원 후 7∼8년이 지나면서 근처에 시설 좋고 진료비 싸게 받는 산부인과들이 여기저기 늘어났고 환자도 차츰 줄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쯤 나 자신도 24시간을 대기하는 것에 피로감도 싫증도 느끼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 쯤, 출혈이 심한 임산부의 분만 후 처치를 하면서 산모의 심박동보다 내 심박동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내가 혼자서 이런 막중한 스트레스를 견디기에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즉시 야간 분만을 포기하고 주간 분만과 외래만으로 진료 범위를 축소시켰고 이후 점차 입원실을 폐쇄했다.


허름한 건물 빌려 개원 후, 24시간 분만과 진료에 빠져 살아
현재의 나를 만든 소중했던 시간이기에 아쉬움·회한 없지만
후배들의 쉼 없는 노력 불구 각박한 현실이 안타깝고 미안해


분만을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유지가 되었지만 나는 2년여에 걸쳐 고민을 했다. 출산직후 아기 궁둥이를 때릴 때 자지러지게 울던 울음소리와 부드럽고 매끄러웠던 아기의 촉감이 그리웠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피를 보는 일 없이 수술도 분만도 안하고 외래 진료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고 미련이 남았다. `병원을 키워서 의사를 두고 다시 분만을 할까? 아니면 낡은 이 건물을 떠나 좀 더 깨끗한 건물에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외래만 계속 볼까?' 난 편하고 쉬운 것을 선택했고 2002년에 근처인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신림동 골목 안 유흥가를 떠나 백화점 앞 대로변으로 나왔고 그 당시로는 꽤 많은 비용을 투자해서 강남에 있는 병의원 인테리어 못지않은 시설로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내가 병원 이전과 확대 여부를 놓고 고민했던 1999년과 2000년 사이에는 IMF 이후 경제 불황이 시작되었고 의약분업 실시라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때부터 의사들은 진료실 밖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일찍부터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을 통해 이런 변화와 조짐을 예견했고 의료계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투쟁에 직접 참여했다. 경제 불황도 문제였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이후 의약분업 실시와 함께 다가 올 의료계 미래가 불투명했다. 이런 당시 상황이 병원 확대인가 현상 유지인가라는 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개원 장소 이전과 함께 나는 제2의 호황을 5년 정도 누리게 되었다. 일찍부터 시작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상담으로 환자들이 늘어난 것 같았고, 카페처럼 꾸며 놓은 환자 대기실이 항상 북적거렸다.

그러나 의사단체 일로 진료를 소홀히 하기도 했고, 갈수록 진료 영역도 줄였고 겁도 많아져 환자도 선별해서 진료하니 당연히 환자도 줄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3년을 한 지역에서 개원을 하니 내원 환자들도 내 나이와 함께 늙어 가고, 요즘은 까다롭고 의심 많은 중국교포 환자들이 내 단골 환자들이 되고 있다.

1990년 개원한 이후 심각한 의료사고도 없었고, 소송이나 실사 당하는 일도 없이 잘 피해 왔다. 개원 초기 세무사 직원을 사칭한 사기꾼한테 10만원을 뺏기기도 했고, 인터넷에 원장과 직원이 쌀쌀맞다는 험담 글이 올라가기는 했어도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다.

몸이 아파서 휴진을 한 적도 없었고, 개원 때부터 도와 준 직원이 아직도 함께 일하니 사람 운도 나쁘지 않았다. 병원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내 그릇 크기가 그 정도라고 생각했고 개원의로서 20여년을 그런대로 평탄하게 잘 해왔다.

90년대의 개원의는 열심히 한다면 그런대로 할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운영비 지출은 고공행진을 한 채 줄어들지 않고 수입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제 시작하는 후배 의사들을 보면 안타깝고 미안하다.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겠지만 의사들은 오랜 학업과 수련 기간에 비해 갈수록 자존감도 줄고 직업으로서의 만족감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과거 호황을 아쉬워하고 무지개를 쫓기보다는 작은 성취감에서 만족을 찾아야한다.

1990년에서 20년 전인 1970년 전후 내가 선택한 결과로 1990년도의 내가 있었고, 그때 내가 선택한 개원의의 길로 지금의 내가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할 길, 내가 취하지 못한 것들, 내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나에 대한 애정이 있다. 인생에서 20년 주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20년을 더 산다면 그때 내가 지금을 회상할 때 어떤 회한이 들지 추측해 본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못한다면 그때는 분명히 후회 할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봐야겠다.

김숙희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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