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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제1번 G단조 작품번호 23
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제1번 G단조 작품번호 23
  • 의사신문
  • 승인 2013.10.2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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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241〉

1835년 어느 날 쇼팽은 슈만 앞에서 자신의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연주를 들은 슈만은 이 곡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거칠지만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 작품이다.”라고 평하자 쇼팽은 신중한 어조로 “감사합니다. 저도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바로 이 곡이 발라드 제1번이다. 슈만은 이 발라드에 대해 언급한 어느 편지에서도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천재성이 가장 잘 나타난 곡이다.”라고 썼다.

쇼팽은 일생동안 네 곡의 발라드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들은 1831년에서 1842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발라드 제1번은 쇼팽이 20세 때 조국 폴란드를 막 떠나 비엔나에 머물고 있을 즈음 고향 바르샤바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와 비통함속에서 지냈을 때 작곡된 곡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 작품은 다른 세 곡의 발라드에 비해 서사시와 같은 느낌을 주면서 쇼팽 특유의 고독과 우수에 젖어있다.

쇼팽의 네 곡의 발라드는 그의 다른 장르인 네 곡의 스케르초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하지만 이들 발라드는 스케르초처럼 전통적인 고전형식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폴로네이즈처럼 폴란드의 향토적인 요소가 깔린 음악형식도 아니다. 그 형식은 그저 자유롭기만 한데 무엇인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말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쇼팽은 이런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는 발라드 형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다. 발라드 제1번은 쇼팽과 폴란드 동향 출신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그렇지만 이 곡이 그 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츠키에비치의 정신세계와 공통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그의 음악 속에 추상적으로 용해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발라드는 본래 중세 프랑스의 서정적인 노래의 한 형태로서 초기에는 단선율로 불리었다가 점점 폴리포니로 발전해나갔다. 12세기에는 대중적인 무곡 형식을 뜻했던 발라드는 13세기에 접어들며 음유시인들에 의해 유럽 각지에서 불리게 되었고, 14세기에는 기욤 드 마쇼와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그 이름을 드높였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작곡가 뒤파이와 뱅쇼아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음악에 붙여진 시의 대부분은 귀부인을 향한 `사랑노래'였다.

이후 영국, 이탈리아, 독일 등지로 퍼지면서 시인 쉴러나 괴테는 옛 전설에서 착상해 시를 만들어 붙였고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는 이들 시들을 피아노 반주가 딸린 독일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발라드는 19세기 들어서 쇼팽에 의해 피아노 장르로 재탄생하게 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울러 퍼지는 피아노 연주. 막다른 골목의 벽에 마주선 듯 숨어 지내다 들킨 독일 장교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굳은 손가락으로 어눌하게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지만 오래지 않아 쇼팽의 음악세계로 빠져든 그는 무아의 경지에서 감동의 연주를 하게 된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가장 긴장되고 감동적인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제작진들은 모두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영혼을 움직인 위대한 작품이 바로 발라드 제1번이다. 또 다른 피아니스트의 극적인 일생을 그린 영화 〈샤인〉에서도 이 곡은 흘러나온다.

발라드 제1번은 자유로운 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주는 “자,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주십시오.”라고 읊조리는 듯하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나타난 후에는 우아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1주제를 우아하고 유연하게 노래하면서 열정을 점점 더해 리드믹컬하게 선율이 이어진다. 클라이맥스로 오른 후에는 눈부신 아르페지오로 전개되면서 장조가 단조로 바뀌게 되고 점차적으로 고요해지면서 제2주제가 나타난다.

중후한 화성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다시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카덴차에 이르고 난 후 경쾌한 음악의 흐름으로 바뀐다. 점차적으로 화려한 선율이 이어진 후 화려한 코다에 이르러 미친 듯이 거친 열정이 넘쳐난다. 20대 젊은 쇼팽의 솔직한 감정 노출은 듣는 이를 완전히 곡속으로 푹 빠져들게 만든다. 피날레는 극화된 대사건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듯하다.

■들을만한 음반: 크리스티안 침머만(피아노)(DG, 1987); 마우리치오 폴리니(피아노)(DG, 1999); 아루트르 루빈스타인(피아노)(RCA, 1959); 샹송 프랑스와(피아노)(EMI, 1954)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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