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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3>
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3>
  • 의사신문
  • 승인 2009.07.0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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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꽃을 보고 있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는 애써 피한다. 인터넷에서 이리저리 검색해 보니 ‘감자란’이다. 무슨 약효가 있단다. 그래서 점점 더 보기 귀한 꽃이 되어가나 보다.
아침 일찍 저절로 눈을 떴습니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데 빗소리도 못 듣고 푹 잤습니다. 잠귀가 밝아 작은 기척에도 벌떡 일어나는 나로서는 참 드문 일입니다.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눈을 뜬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합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아침 식사 준비도 끝나 있었습니다. 김치, 된장찌개, 산나물무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생선 조림도 있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께 좋은 인상을 드렸나봅니다. 이 산 속 아침에 생선 조림이라니….

산에서 입이 구진할 때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 몇 가지 골라 배낭에 넣고 출발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제 막 아침 7시를 넘기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점심 도시락이 묵직합니다. 아주머니는 비가 더 오지는 않을까, 길이 젖어서 미끄러운데 산에 가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이 많습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산 속에서 비온 뒤의 촉촉한 아침 공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셨습니다.

인적이라곤 없는 오솔길을 생각 없이 자박자박 걷다가 내 발소리에 퍼뜩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습니다. 풀잎, 나뭇잎이 모두 젖었고 개울가의 돌도 다 젖어 있습니다. 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숲길로 들어서니 컴컴합니다. 희미한 길을 찾아 한 시간쯤 오르다 물가에 마침 보기 좋은 바위가 있기에 잠시 쉬었습니다.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행복을 마십니다. 문득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립니다.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와 아버지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앞세우고 나서도 한참 뜸을 들이며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셨습니다.

상원사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한가하고 여유 있었습니다. 거기 높은 곳에 샘터가 있습니다. 물 한 잔 마시고 병에도 가득 담았습니다. 무슨 산악회라는 표식을 한 사람들이 여러 명 당도하면서 정적은 깨졌습니다. 이 사람들도 또 앞세워야 하겠습니다. 치악산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물맛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정말 한 순간에 소란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집의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는 곳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기에 행여 이분들에게 방해가 될까 저어하며 돌아섰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등산로 가장자리엔 아직 지지않은 은방울꽃이 조롱조롱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저만치 작은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혹시라도 개가 길을 따라 나서면 연락을 해달라는 글과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군요. 절에서 사는 견공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가끔 등산객을 따라 나서는 모양입니다.

이젠 오르막이 거의 끝난 듯합니다. 치달아 올라오는 뒷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려 몇 번이고 옆으로 물러섰습니다. 오늘 여기서 내려갈 때까지 계속 이렇게 걸을 생각입니다. 그러면 길옆의 풀과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이 갤듯합니다.

그렇게 걷다가 문득 키 높은 풀 사이로 보이는 노르스름한 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흰색인 듯도 합니다. 한 뼘 남짓한 꽃대에 스무 송이 남짓한 꽃이 층층이 달려 있습니다. 꽃 모양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난입니다. 난 잎은 보이지 않습니다. 해발 천미터가 넘는 이 높은 산 속에 난이라니. 가슴이 뜁니다. 문득 내게 다가온 귀한 손님입니다.

아예 배낭을 벗어 놓고 엎드렸습니다. 더 가까이 살펴보기 위해…. 그래도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없어 휴대전화로 사진도 찍고 혹시 다른 개체가 더 있는지 주변도 둘러보며 삼십분도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혹시 뒤따르던 누군가 꺾지는 않을지. 누군가 더 욕심을 내어 파내어 가지는 않을지. 그 다음부터는 이 꽃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느라 걸음이 더 느려졌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은 제법 멉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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