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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지리산 화대'(화엄사-대원사) 종주 트레일 트레킹
제11회 `지리산 화대'(화엄사-대원사) 종주 트레일 트레킹
  • 의사신문
  • 승인 2013.09.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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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동방사회복지회 어린이사랑의원장, 연세의대 명예교수>

이재승 원장과 100회 마라톤클럽 회원들.
이재승 연세의대 명예교수
섬진강 운해·노고단 밤하늘의 별과 함께 무사히 종주

토요일 저녁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호정, 내일 송산회 산행에 나오는가?” 호정은 나의 호이고, 송산회는 20년 전에 창립한 고교동기생들의 노송대 산악회이다.

“곤란하겠어.” “왜? 산악회를 만든 사람이 자주 안 나오고 그러나.” “종아리가 아파서 그래.” “오늘 마라톤 했나? 10년 넘게 하면서 왠 엄살이야?” “그게 아니라, 그저께 광복절 날 지리산 종주 마라톤을 하고 와서.” “뭔 소리여?”

열흘 전쯤 100회 마라톤클럽 회장으로부터 8월 15일 지리산종주마라톤에 같이 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 망설였다. 의사 입장에서 평소 산에서 달리는 것을 말려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11일에 서울 마라톤 혹서기 대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과천대공원에서 매년 가장 더울 때 하는, 힘들기로 유명한 대회이다. 그나저나 나의 274번째 마라톤인 혹서기 대회는 즐겁게 완주하였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2박 3일로 했었음)가 14시간에 가능할까 하는 호기심과 무릎에 무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도 나는 14일 밤 9시 압구정에서 출발하는 대절 버스에 회원 42명과 동승하였다. 나 혼자 칠순으로 최고령이다. 임원들이 준비해온 음식물을 나누어 주는데 양이 많아 나는 배낭에 다 넣지도 못했다.

버스에서 잠을 설치고 15일 새벽 2시 25분에 구례화엄사에 도착하였다. 대여섯 대의 버스가 보였으나 참가자들은 이미 출발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 클럽이 맨 나중에 출발하나보다. 음력 7월 9일의 달빛 없는 깜깜한 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출발 전 대회 진행도, 인사도, 출발시각도, 번호표도 없다. 이것도 참가비 받은 대회인가 생각하니 머리도 깜깜하다.

회원들은 밝은 랜턴에 힘이 넘쳐 달려가 버렸으며 멀리 위쪽으로 불빛만 언뜻언뜻 보인다. 나는 자연스레 맨 뒤다. 언제나 시작은 그렇다. 하필이면 목구멍 진찰용 랜턴을 골라오다니, 불빛이 너무 약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는다. 이 대회는 1등 주자의 기록이 7시간대라서 2배인 14시간을 제한시간으로 정했다고 한다. 제한시간 내 완주는 어렵겠지만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시작이 반이다. 얼마쯤 오르다가 알바(길을 잘못 들어 헤맴)에서 돌아온 회원들과 만났으나 곧 다시 멀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화엄사-노고단 길을 간다. 80년대에 자주 다녔던 추억의 길이다. 그간 산행보다 마라톤에 몰두했었지만 다시 산으로 와야 할 텐데….

노고단에 이르니 5시다. 아직 하늘 가득 별들이 밝게 반짝인다. 이곳에 올 때면 언제나 한동안 누워서 가까이 쏟아지는 별똥별을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하곤 했었다. `별 가득한 노고단의 밤하늘' 한 장면은 마음속에 있다.

노고단 지나서 임걸령에 이르니 오래전 산을 좋아하는 연세의대 노재훈, 이우정, 인요한 교수들과 산행을 같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급경사길로 내려서서 피아골대피소에 들러 질매재로 오르고 질등, 문바우등, 느린목재를 지나 왕시루봉에 올랐었다. 아직도 왕시루봉에는 10여 채의 옛날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이 남아 있고 인요한 교수 혼자서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토끼봉에 이르니 7시다. 정상을 가득 메운 달림이들이 아침을 먹고 있다. 나도 백갈매기(친구의 별명)가 주는 초콜릿과 오이를 먹었다.

7시 30분이 되자 5주 전 7월 10일의 7시 30분이 생각나 마음을 괴롭힌다. 대한민국 종단 622km 울트라마라톤 제 4일째 이 시간에 다리가 멈추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몸에는 부상도 물집하나도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원통하고 분통터지고 내 자신이 밉고 지금까지도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이재승 원장과 100회 마라톤클럽 회원들.
7월 7일 아침 6시 최고령답게 81명 중 맨 꼴찌로 해남 땅끝 마을을 출발했었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 50km:63등, 100km:29등, 150km:7등, 200km:3등, 250km:14등, 300km:20 등이었다. 그런데 청주(350km, 제한시각 11시 30분) 가기 전 신탄진 330km 지점에서, 7시 30분에 갑자기 정지해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 먹지 못해 배가 고프고,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육체와 정신이, 선과 악이 싸운 결과인가? 절대금기인 “포기”를 하다니…

생각에 젖어 명선봉을 오르는데 부산에서 온 달림이가 “인간극장에 인터뷰로 데뷔했으니 내년에는 주인공으로 나오시지요.” 한다. 또 다른 달림이는 “622에서 뵈었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인사한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멀리 섬진강 운해를 바라보며 걸으며 달리며 간다. 역시 지리산은 종주를 해야 하고, 섬진강 운해와 노고단 밤하늘의 별들을 봐야 한다.

연하천대피소에 8시에 도착했고, 전에도 그랬듯이 황도 통조림을 사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고, 게토레이 한 병을 손에 들고 다시 달린다. 9시 15분에 벽소령대피소에서 물과 간식을 먹고 달리는 듯 걸어서 선비샘에 10시 도착, 빈 물병들을 채운다. 일행은 회장포함 여섯 명이다. 세석대피소, 촛대봉,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대피소에 12시 30분에 도착하였다. 화엄사에서부터 10시간 걸렸다. 곳곳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옛날에 비해 가기 쉬운 능선길이 되었다. 서울은 33도 찜통더위라는데 이곳은 덥지 않고 시원하고 맑은 공기에 기분이 상쾌하다.

배낭 속 음식과 대피소에서 산 통조림으로 요기하고 천왕봉 정상(1915m)에 오르니 1시 15분이다. 우리는 천왕봉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제한시간인 4시 30분까지는 3시간이 남았고 거리는 11.7km 남았다. 부지런히 중봉, 써리봉을 지나 치밭목대피소에 오니 3시 20분이다.

옷은 하루 종일 땀에 젖어 있다. 모두들 지친 모습이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여 무재치기폭포를 지나 유평리 마을 입구에 오니 5시 20분이다. 허기지고 목이 마르던 차에 일행들은 냉막걸리 한 잔(3000원)씩을 들이킨다. 여유 있게 걸어서 대원사에 도착하니 6시 정각이다. 드디어 장장 15시간 30분 걸려서 도상 46km의 지리산 화엄사-대원사 종주를 해냈다.

칠순에 1일 종주가 염려되었으나,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한군데 상처도 없이 무사히 마쳐서 감사했고, 몸은 가벼웠으며 즐거웠다. 다만, 몇 번 신지 않은 비싼 뉴발란스 산악마라톤화는 약 10만보의 자갈, 바윗길을 지나는 동안 양쪽 모두 앞부분의 접착이 떨어지고 상처투성이라서 다시 사용하기 어렵게 되어 아까운 생각이다.

2km를 더 걸어 내려와 버스 주차장 유평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니 회원들이 반기며 환영한다. 대회에 참가한 100회 마라톤 클럽 회원 42명 중 26명(65%)이 완주했고 9명이 제한시간 내 완주했다. 다른 회원들은 짧은 코스로 종주했다. 부상자는 없었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는 자정 넘어 도착하였다. 내년에 다시 할런지는 내년에 생각해야겠다.

이재승 <동방사회복지회 어린이사랑의원장, 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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