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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6] 상황이 바뀌면 대응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_박정하 보험이사
[칼럼 16] 상황이 바뀌면 대응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_박정하 보험이사
  • 의사신문
  • 승인 2013.08.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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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하 <서울시의사회 보험이사>

박정하 서울시의사회 보험이사
원치 않았던 의약분업, 원가 이하의 수가를 강요당하는 수가계약 체계, 부당삭감, 치료해주고 치료비까지 물어내야 건강보험 구조… 현재 의사들이 처한 의료시장의 상황이다.

이러한 왜곡된 의료현실을 타개할 방법으로 의료계가 전가의 보도처럼 항상 거론하는 구호가 당연지정제 철폐와 선택분업 도입이다. 하지만 당연지정제가 철폐되고 선택분업으로 전환되면 정말로 의료현실이 개선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려 없이 습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지금 의사들이 처한 현실은 다른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의사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의약분업도 당시 의협회장이 동의를 해줘서 시작됐고, 의약분업 폐지를 위한 투쟁도 의료계 대표가 백지화시켜 실패를 했다. 그런 회장을 선택한 것도 의사들 자신이었고, 투쟁 백지화에 암묵적 동의를 한 것도 의사들이었다. 앞으로의 의료정책 방향도 의사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이 될 것이다.

현재 의료계는 갈림길에 놓여있다. 정부는 이미 건강보험 지속을 위한 방안으로, 총액계약제 시행을 로드맵으로 발표하고 만성질환 관리제와 강제포괄수가제 확대 시행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는데, 의료계는 아직 방향설정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당연지정제 철폐와 선택분업을 주장하고 있다.

의료계도 달라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흘러간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의료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의 총액계약제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총액계약제를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여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는 총액계약제 실시 후 본인부담금을 없애는 방법으로 무상의료를 계획하고 있다. 만약 의료계가 여기에 반대한다면, 의사들의 선택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의사들은 말로는 수가인상과 건강보험 틀을 깨자면서도 실제로는 무상의료 정책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얼마 전 골다공증 치료제를 1년만 보험급여를 인정하고 이후부터는 전액 본인 부담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의료계가 극력 반대하여 무산시킨 것과 65세 이상 본인부담금 상한선 인상 요구, 그리고 최근에 의협에서 주장하는 상급병원 선택진료비 폐지 등이 무상의료 실시 논리와 동일한 것인지 알고나 주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선택진료비에 대해서만 살펴봐도 의약분업 도입 시 선택진료비를 책정한 이유는 병원의 수가보전 말고도 환자쏠림을 막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다. 환자의 의료소비 행태를 결정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는 가격인데, 현재 1차의료기관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는 이유는 가격차이가 환자들의 의료기관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선택진료비를 없앤다고 수가 올라갈 일도 없을 뿐더러, 설사 수가가 오른다 하더라도 그나마 환자쏠림을 막던 가격차이가 없어지면 1차의료기관을 찾는 수요는 더욱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1차의료기관을 활성화하려면 선택진료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이자는 주장을 해야 한다.

모든 정책이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 당연지정제는 건강보험 도입 시에는 의사들의 동참을 강제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총액계약제 실시를 앞둔 현재에는 개원의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안전장치이며, 총액계약제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적 무기이다. 선의로 시작된 제도가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나쁜 목적을 위한 제도가 상황이 변하면서 회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적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당연지정제가 그 예에 해당된다.

이미 상황이 바뀌고 법적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의료계에서는 당연지정제 철폐를 위한 위헌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선택분업 전환 또한 정부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으며, 설사 선택분업으로 바뀐다고 해도 약사들에 대한 분풀이는 될지언정 현 의료상황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정책 방향은 의사들에게는 더욱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닥칠 의료계의 위기는 전 회원들의 화합을 통해서만 막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다. 의료계 대표자들이 할 일은 큰 틀에서 의료계가 원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세부 사안에 대해 의료계의 의견을 통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의 로드맵 대로 총액계약제하에 무상의료가 실시되는 상황에서, 여태까지 의료계가 주장하던 당연지정제를 철폐하고 선택분업으로 전환한 상황이 지금의 의료현실보다 좋을지 생각해보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길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투쟁과 협상의 기본은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지키고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박정하 <서울시의사회 보험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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