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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치간느〉
라벨 〈치간느〉
  • 의사신문
  • 승인 2013.08.0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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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230〉

제1차 세계대전이후 1922년 라벨은 런던을 방문했다. 당시 런던에서는 헝가리 태생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옐리 다라니와 첼리스트 한스 킨틀러가 자신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를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다.

음악회가 끝난 뒤 라벨은 다라니에게 헝가리 집시 노래를 몇 곡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밤 헝가리의 강렬한 현악 전통과 집시의 열정을 구사한 다라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라벨은 프랑스의 세련된 감수성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결과 2년 만인 1924년, 비르투오소적인 모든 요소가 축적된 바이올린 작품인 〈치간느〉를 완성하여 다라니에게 헌정한다.

다라니는 바이올린의 거장 요제프 요아힘의 조카딸로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예뇌 후바이를 사사한 뒤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녀가 슈만과 요아힘의 계시를 받아 슈만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찾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그녀는 바르토크와 리사이틀을 가지며 전문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았고 영국의 본 윌리엄스나 구스타브 홀스트와 같은 작곡가는 그녀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작곡하는 동안 그는 친구인 엘렌 주르당-모랑주에게 “바이올린과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를 가지고 빨리 우리 집으로 와주었으면 좋겠소.”라는 전갈을 보냈고, 이후 그의 카프리스 연주를 들으며 자신의 작품에 헝가리 민속음악의 특징, 집시의 애환 뿐 아니라 바이올린의 테크닉에 관한 영감을 반영했다. 특히 바이올린의 테크닉적인 풍부한 변화에 깊이 매료된 라벨은 이 작품에 바이올린으로 가능한 모든 테크닉을 집어넣고자 했다.

이에 대해 주르당-모랑주 부인은 너무 어려워 소수의 대가들 아니면 쉽게 연주할 수 없다고 작곡가를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더 잘 되었군요. 아마추어 연주가들이 저를 죽이려고 덤벼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마추어나 평범한 프로 연주자들이라면 이 곡으로 시간을 허비할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이 곡은 난해한 테크닉 때문에 사라사테, 비네야프스키와 같은 비르투오소 작곡가들의 작품에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라니는 1924년 4월 런던에서 초연을 갖기 불과 3일 전에 악보를 받았던 만큼, 이 곡에 관해 작곡가의 해설을 거의 받지 못했다. 초연을 가질 당시 라벨은 청중석에 있었고, 이 곡을 본능적으로 이해한 그녀는 연주를 성공하였다. 이후 라벨은 프랑스 바이올린니스트 지노 프란체스카티와 함께 반주자로서 연주여행을 다니며 이 곡을 연주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작곡가는 그해 여름 이 작품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고 1924년 11월 가브리엘 피에르네가 지휘하는 콩세르 콜로네 앙상블의 반주와 다라니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치간느〉는 프랑스어로 `집시'라는 뜻으로 헝가리 민속음악인 차르다슈(Czardas)의 전통적인 느린 속도의 음악인 `프리스카'와 빠른 템포의 음악 `라산',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라벨이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과 헝가리의 민속음악을 오랫동안 깊이 있게 연구한 결과 이러한 헝가리 집시음악의 구성에 바탕을 두고 이 〈치간느〉를 구상하였다.

먼저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긴 카덴차로 시작하며 즉흥적이고도 맺힌 한을 넋두리 하듯 음울한 집시의 선율 속에 몇몇 독창적인 색채의 주제들이 등장한다. 헝가리 집시들의 회환이 담겨 있는 듯한 일종의 자기 고백적 성격의 음악이다.

이어 트레몰로 부분이 등장하면서 경쾌한 피아노의 선율에 이어 집시 특유의 선율과 함께 흥겨운 분위기의 바이올린이 돋보이는 기교로 클라이맥스까지 끝없이 발전해 나가며 난해함과 그로테스크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엄청난 기술적 고난이도의 테크닉과 헝가리 정서에 대한 이해, 우울과 낙천의 이중적인 집시정서의 충돌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바이올린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은 라벨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바이올린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들을만한 음반: 지네트 느뵈(바이올린), 장 느뵈(피아노)[EMI, 1946]; 아르투르 그뤼미오(바이올린), 마누엘 로장탈(지휘) 라무뢰 콩세르 오케스트라[Philips, 1966]; 루치에로 리찌(바이올린), 에른스트 앙세르메(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Decca, 1969]; 정경화(바이올린), 샤를 뒤투아(지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Decca, 1977]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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