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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송파(松破)에서
이 곳 송파(松破)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3.06.1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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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서울시·송파구의사회 고문>

김인호 서울시·송파구의사회 고문
한가한 오후, 진료실 창밖을 내다본다. 눈부신 초여름의 송파대로에는 차량이 물결치듯 흘러간다. 가로수를 끼고 자전거 도로와 인도에는 행인들이 바쁘게 오간다. 그 끝은 4,5층짜리 상가가 줄지어 있다. 어제 오늘 비슷한 풍경이다. 그러나 400년 전 한 맺힌 사연으로 얼룩진 바로 이 길, 굴욕과 슬픔이 깔려 있음을 저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때는 1637년 정축년 정월 그믐, 두 달 전 병자년 겨울에 청태종(淸太宗) 홍타이지의 10만 대군의 침략으로 피난하여 59일을 버티다 굴복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을 뒤로 하고 정축하성(丁丑下城)하여 문정, 가락, 송파를 지나 삼전에 이르러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하며 엎드려 항복소를 올린 치욕의 길이 이곳 송파대로이다. 문헌에 의하면 청 태종은 자신이 앉아 있는 단에서 1백보 앞까지 자갈을 깐 후 인조로 하여금 죄인이 입는 베옷을 입고 엎드려 기어 오도록 한 후,단에 이르러서는 “대죄를 용서하여주소서”라고 빌면서 세 번씩 아홉 번을 땅에 머리를 찧는 예식을 행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인조의 무릎이 까지고 이마에 선혈이 낭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머리로 땅바닥을 받을 때마다 배석한 청나라 관리들이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다며 더 세게 박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항복 절차 후 인조는 송파 삼전나루에서 달랑 남은 단 두 척의 거룻배로 귀경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최명길 등은 인질로 잡혀 갔다. 그 아픈 역사의 `삼전도청태종공덕비'가 1639년에 세워져 세 차례나 옮겨져 남아 이 길의 끝, 잠실대교 전 석촌호수 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하며 경기, 강원의 떠돌이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뚝섬으로 땔감 담배를 넘겨주며 삼전도의 주막과 여인숙이 즐비하던 이 곳 송파는 조선 10대 나룻장터이며 사통팔달의 요충지로 지금은 가락농수산물센터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이곳 송파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과 성남을 경계로 서울의 동남쪽 끝자락이며 당시는 한강 남쪽에 뽕나무와 삼밭, 소나무가 둘러 싼 언덕이라 하여 삼전(三田),잠실(潛室),송파(松坡)라 불리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과 양주군에 속했으나 1949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관할이 되었다.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그에 포함 되었다가 1979년 강동구로, 1988년에 지금의 송파구로 분리 신설되면서 18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고 하계올림픽을 치루면서 평화로운 주거일번지가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이 곳 송파에서 보냈다. 소아과 의사로 개원하던 그 해 1979년 겨울, 이곳은 잠실대교와 성남시를 잇는 신작로만 덩그러니 깔려 있고 주변은 황량했었다.

내가 생면부지의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사연을 보면 우연이었지만 가히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군의관을 전역한 후 명동 백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스텝으로 재직할 때였다. 스텝 몇 명의 출근을 배려하여 병원 측에서 공용 `포니' 승용차를 제공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뒷좌석에 앉은 내 앞 포켓에 대형 지도가 접혀 있었다. 우연히 그 지도를 펼쳐 보던 중 빨간 사인펜으로 원을 그려 놓은 지역이 두 군데 눈에 띄었다. 송파 가락과 노원구 상계 지역이었는데 기사의 말로는 2차 분원 선택지로 내정, 역학 조사 후 조만간 결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나는 개업이냐 교수냐, 두 갈래 진로에 갈등하다가 개원하는 쪽으로 내심 기울어져 있던 차였기에 주말을 이용해 송파 쪽으로 가 보기로 하였다. 마침 명동 중앙극장 앞에서 송파 행 노선버스가 있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을 건너 강남 영동 잠실을 지나며 배추 고추 참외밭들이 즐비한 농촌 길로 접어들어 초행길인 나를 한심스럽게 하더니 한 시간 반 만에 멀리 남한산성이 보이는 시골 농촌 벌판에 내려놓았다. 실망감이 차올라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도에 원을 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둘러보니, 광활한 벌판에 입주된 5층 아파트타운이 3000세대가 보였고 또 추가로 3000세대, 또 한양, 성원아파트가 건축 중이었다. 지금의 가락, 송파 단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파대로에는 상가들이 몇 채 보였고 띄엄띄엄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위 3km 반경에는 병원이 없었다. 나는 결국 송파대로 상가 2층에 `3월 소아과 개원 예정' 플래카드를 걸었고, 풋내기 개원의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백병원은 두 곳 중 상계동에 분원을 지었는데, `그 때 출근차에서 그 지도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향방이 궁금하다.

개원 신고 차 강동구의사회를 방문하니 직원이 법제이사와 회장에게 인사시켰고 그들은 똑같이 개원 준수사항을 일러주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강동구 개원의 전체가 70명 내외였는데 지금은 송파구에만 400여명이 넘는다.

33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이제 송파는 문화 역사 체육 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서울의 대표 거주지로 서 있다. 그 세월 속에 하루같이 지나 왔지만 개원 당시의 가락 아파트는 이제 낡아 재건축한다고 헐어버리고 있다. 나의 개원도 쇠퇴기에 접어들어 길 건너로 이전했다.

만감이 교차하고 격세지감이 흐른다. 그러나 가끔 “이 곳에 계시군요 선생님! 여전하시네요. 죽을 고비 넘겨주신 덕택으로 그 딸이 손자를 보았는데 이 아이도 선생님이 고쳐 주셔야지요!”하며 할머니가 손자들을 데리고 방문할 때, 이 곳 송파에서 벌써 한 세대를 넘겼음을 실감한다. 대학에 재직하던 동료들도 정년퇴임을 하고 인생의 나머지를 위해 발길을 돌리고 있으니 당연한 것을….

그러나 나에게는 자랑스럽고 역동적인 추억이 있다. 1988년 겨울, 의사회 총무 일을 보면서 길흉 상사, 송년회, 면허증 반납의 궐기대회 등을 할 때였다. 의료사고로 `강동김외과의원'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오후에 노련한 고문(고 홍승억 회원)과 같이 병원 복도에서 멱살을 잡히면서도 밤새워 대치하였다. 결국 시신 앞에서 시위하던 가족들에게 `원장의 책임 밖의 (무과실)심근폐색'이라고 설득하여, 도의적 보상 정도로 해결되었다. 그 일로 김 원장과는 평생 형 아우로 지나고 있다. 1997년 회장 일을 볼 때였다. 회원 몇 명이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사망하여 영안실에서 위령제를 지냈는데 그 때 아산병원 원장을 독대, `송파구회원 특별건강검진'을 토요일 오전 7시, 50% 할인가로 협의하였다.

요즈음은 서울 전역의 대형병원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당시는 파격적인 최초의 협상이었다. 그리고 `송파구회보'를 최초로 창간하며 회원들의 특기와 정보를 공유하였고, 각 구 대항 테니스대회에서는 테니스 회원들을 새벽같이 불러 모아 손발을 같이 맞추어 우승컵을 갖고 왔었다.

그러나 아쉽고 억울할 때도 있었다. 열정적인 혈기로 의쟁투 상임위원, 의협 의무이사와 의약분업대책위원장을 맡아 역사적인 과천 폐업궐기대회(2000년)를 주관할 때, `제주시범사업'이나 `일본식 선택분업'으로 쟁취하지 못한 것이 나 뿐 아니라 우리들(?)의 정치적 한계점이었음을 깨달았고, 그것은 후회로 남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다.

이 곳 송파에서 인생의 아픔과 성숙을 파묻었기에, 주마등처럼 지난 시절을 회상해 보면 요즈음 속상할 때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우리 개원의들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이 점점 몰락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거대 의료보험공단이 관리하는 사회주의 의료는 의사의 길이 노동자와 같은 구도로 몰고 가고 오히려 심평원의 관제 횡포에 시달리기도 한다. 겸손하고 진지하게 황혼기의 개원의로 이 곳 송파를 지키고 싶지만, 인조의 외교실패로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처럼 나 같은 선배들이 시대 변화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아마도 이것은 전공의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듯, 젊은 후배들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김인호 <서울시·송파구의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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