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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2>
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2>
  • 의사신문
  • 승인 2009.06.1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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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울가엔 산딸기가 농익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날 산에 올라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동생과 함께 종다래끼 가득 딸기를 채웠다.
치악산 공원 입구에 민박집이 더러 보였습니다.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는 곳을 지나쳐 가게가 딸린 허름하게 생긴 집 마당에 택시는 멈췄습니다. 아저씨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다목적 공간입니다. 식당이기도 하고 가게이기도 합니다.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 분이 십원짜리 화투를 치고 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안내한 방은 제법 깔끔했습니다. 그런데 욕실이 없습니다. 혹시 욕실 딸린 방이 있느냐고 하니, 이 아주머니 한 말씀 하십니다. “남자 혼자 자면서 욕실 딸린 방은 뭐한대유. 돈 아깝게” 그렇긴 하네요.

짐을 풀고 개울가를 둘러보려고 나오니 아직 택시는 마당에 서 있고 기사 아저씨는 화투판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이쪽 할머니 패가 엄청 화려합니다”

“그런 말 말어. 나 잃었단 말여, 시방”

“참견만 하지 말고 젊은이도 같이 처 볼텨?”

“아주머니, 제가 며칠 전 남산을 팔려고 내 놨는데 아직 작자가 나서질 않아 돈이 궁해요. 게다가 홍콩을 출발한 배도 아직 소식이 없고. 거기 실린 물건들 팔면 돈이 좀 되거든요”

이십년 전에 들은 농담에 할머니들 웃음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

개울가에 자리 잡은 손바닥만한 논에는 얼마 전에 심은 벼가 자라고 있고 논두렁 아래쪽엔 산딸기가 농익어서 질크러지고 있습니다. 시큼하고 달콤한 산딸기 알갱이가 입에서 터집니다. 물소리와 바람소리 속에 감자꽃이 지천으로 피어오르고 맑은 물이 찰랑대는 논배미에선 올챙이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적이 언제였는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시는 들어오는 차도 없었습니다. 나 어렸을 때, 그때도 그랬습니다. 산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산 초입에 남겨두고 잰 걸음으로 올라간 뒤 우린 도랑의 돌을 뒤집어 가재를 찾고, 산딸기를 땄습니다.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이 불어 덥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버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둘이 큰 소리로 불러도 대답은 없었고. 지금 사십년 전의 그 고요와 한가함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주인 내외와 함께 일찌감치 저녁을 먹었습니다. 산골에선 하루가 일찍 끝납니다. 방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화면이 고르지 않습니다.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내일 날씨를 확인하려고 작게 켜 두었습니다. 흐리고 곳에 따라 비도 온다고 합니다. 내일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겨야 하겠습니다.

배낭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홉시 전에 잠을 청하다니. 여기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불을 끄니 세상 천지에 이런 어두움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요.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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