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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학회 창설의 길을 연 - 박충서
신경학회 창설의 길을 연 - 박충서
  • 의사신문
  • 승인 2013.03.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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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학회 창설 앞장…뇌과학자로서 활발 연구도

박충서(朴忠緖)
박충서(朴忠緖)는 1926년 경북예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던 큰형을 따라 인천으로 가서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약대에 입학하던 해에 광복이 되었고 이 후 공부를 더 하고자 대구의대(경북의대의 전신)에 입학하던 해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고학으로 내과 레지던트까지 공부를 마치고 미국 메릴랜드주립의대 대학원으로 유학하였다. 선생은 학창시절 고학을 하면서도 우등을 놓치지 않았고 유학시절에도 항상 전 과목 1등으로 각국 학생과 교수들의 주목을 끌었다.

귀국 후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현 국립의료원) 신경과 과장으로 발령받았다. 1962년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태평양신경학회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선생은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고 전문적인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바로 유럽(런던과 코펜하겐) 유학길에 올랐다. 유럽에서 돌아온 후 선생은 라오슨의 도움으로 유럽에서 흔했던 다발성경화증 환자 16례를 국내에서 발표 하였다. 이 발표로 정신과의 반발이 심하였지만 선생은 그 후 44례를 미국 신경학회지에 발표하였고 정신과의 반발은 잠잠해졌다.

1967년 호주에서 열린 제2차 아시아태평양 신경학회 초청을 받아 한국의 신경질환에 대해 강연하였고 그 후 일본에서도 초청하여 다녀왔다. 1971년 초 신경내과학회를 창립, 의협에 가입신청을 하였으나 부결되었다. 1973년 선생은 한양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신경과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는 인산인해로 몰려들었고 청와대의 요청으로 육영수 여사 모친의 진료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병원진료와 강의, 업무 등으로 대학병원측에 의료인력 증원을 신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기에 선생은 사직하고 개업하였다.

환자진료와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981년 가을 일본 교토에서 세계신경학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열려 참석하였는데 전 세계 각 나라 대표들이 강연을 하였지만 한국만이 유일하게 빠져있어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고 다시금 신경학회 창립의 소망을 떠올렸다. 귀국 후 선생은 개업 중이던 병원 문을 닫고 신경과 독립에 전념하였다. 우선 신경과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진정서를 만들어 보건사회부와 의협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 급기야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하였다. 며칠 후 보건사회부에서 연락이 왔고 담당직원은 연말 국회에 상정하겠으니 신경과가 필요한 이유의 증거서류를 속히 제출하라고 하였다. 국회 상정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국내 신경학자들을 스칸디나비아클럽 소회의실에 모아 내과계 의사들을 주축으로 학회를 다시 만들었고 의협에 가입신청 하여 통과되었다.

선생은 긴장과 피로의 누적으로 오직 쉬고싶은 일념에서 현대에서 사우디발전소로 보낼 의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정주영 회장에게 부탁하여 출국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없는 동안 국내에서는 정신과와의 협상이 다시 일어났고 미국의 예를 따라 이미 등록된 신경학회가 취소되고 정신과에서 분리된 형태의 신경학회가 등록되었다. 그리고 1982년 대통령령으로 마침내 신경과 독립이 공포되었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선생은 대구로 내려가 영남의대 신경과 주임교수를 맡으며 대한신경과학회 영호남지회를 창립하였다. 고생스러웠지만 여러 지인들의 도움에 힘입어 신경과의 불모지였던 지방에도 신경과를 알릴 수 있었고 1987년과 1990년 대한신경과학회 회장직도 맡는 등 신경과 발전에 전념하였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선생은 병원의 진료부장을 맡아달라는 원장의 권유를 고사하고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초능력의 세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신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초라하기만 했다. 주위의 편견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초능력을 뇌과학의 영역이라 믿었던 선생은 꾸준하고 일관된 연구와 발표를 몇 년간 지속하여 마침내 대전 대덕과학연구단지에서 초청을 받아 기초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초능력과 그 필요성에 대하여 강연하게 되었다. 그 열매는 1994년 초 한국정신과학학회가 탄생하는 것으로 가시화하였다. 우리나라 유수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이 학회는 선생을 고문으로 추대하여 정부 산하기관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기(氣) 측정장치를 개발하는 등 현재까지 연구를 지속하며 발전하고 있다.

선생은 의사이자 뇌과학자로서 평생을 진료와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후배들에게 더 나은 의료환경과 소명을 만들어주고자 노력하였다. 선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무한한 에너지로 충만하고 어떤 법칙에 의해 살아있는 듯이 움직인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우주의 양면이지만 일체이고 그 원동력은 사랑이며 이것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뇌라고 믿고 있다. 때문에 뇌의 능력 또한 무한하며 이성과 본능을 담당하는 신생뇌와 구생뇌의 관계, 사랑의 실천으로 인해 더 배가되는 뇌의 능력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고 적용한다면 인류의 발전은 물론 삶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집필 : 하정상(영남의대 신경과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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