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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1>
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1>
  • 의사신문
  • 승인 2009.06.0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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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박집 텃밭의 감자꽃
불과 몇달 전에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제법 거친 비바람이 날리던 백록담을 보고 왔는데 또 어딘가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한 곳이 치악산입니다.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었던 산이었습니다. 어렸을적 이 산 품에서 온갖 풀과 꽃 이름을 옥수수 농사짓던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치악산은 아버지와 내게 그런 산입니다.

상원사 쪽에서 구룡사까지 치악산 종주를 마음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등산로 입구 어디쯤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할 요량입니다. 오늘은 어찌되었든 등산로 초입까지만 가면 되니 서둘 이유가 없습니다. 고속버스로 원주까지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신림에서 내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상원사 아래 성남이라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어쩌면 그 마을 북쪽 어딘가에 산성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나가는 노인에게 길을 물으니 걸어가기는 너무 멀다고 합니다. 지금은 버스도 없고….

이럴 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금은 채 만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정을 호사스럽게 마무리합니다. 나나 기사 아저씨나 급할 것이 없으므로 차는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한 아주머니 한 분이 택시를 막아섭니다.

“김 씨. 요즘 왜 이리 뜸해. 다른 대포집 다니는 거 아니야?”

“비켜. 손님 타고 있잖아. 알았으니, 일단 비켜”

“오늘은 꼭 와! 안 오기만 했단 봐라!”

아저씨의 은근한 통사정에 아주머니가 못 이기는 체 옆으로 비켜섭니다. 이 아저씨 오늘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낸 택시요금은 오늘 저녁 고스란히 저 아주머니 손에 넘어갈 듯합니다. 차는 다시 한가한 길을 달립니다. 길 양쪽 밭에는 감자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저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차가 오는 기척에 비켜섭니다. 기사 아저씨는 내게 양해도 없이 차를 세우고는 아주머니께 타라고 손짓합니다. 그래도 전혀 밉지는 않았습니다. 타라고 얼른 남의 차를 타실 아주머니는 아니었습니다. “같이 타고 가시지요”하고 거드니 그제야 미안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표정으로 뒷자리에 오릅니다.

이웃집 아들 서울서 결혼식한 이야기에 동네 강아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주머니를 내려드리고 나서야 나는 민박집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잘 아는 집이 있다고 합니다. 이 아저씨 말씀은 믿어도 될 듯합니다. 아저씨는 아마 손님 한 사람 데려다 준 대가로 약간의 구전을 받아 대포값에 보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집에서 자야겠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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