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신년특집 기념수필 - 어머니와 맞다듬이질의 추억
2013년 신년특집 기념수필 - 어머니와 맞다듬이질의 추억
  • 의사신문
  • 승인 2013.01.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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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임 <전 이화의대동창회장, 중구 동호의원장>

김태임 전 이화의대동창회장 중구 동호의원장
삶의 희노애락 담겼던 아름다운 소리 그리워져

어머니는 바람이 잘 불고 햇볕이 짱짱한 날이면 이불 빨래를 하셨다. 먼저 어머니는 짚과 나무를 잘 태워서 만든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내려 잿물을 미리 만들어 두셨다. 이렇게 만드신 잿물에 이불 호청을 하룻밤 담가 두셨다.

다음 날 맨발로 호청을 꾹꾹 밟아 주셨다. 그리고는 빨랫돌에 얹어서 방망이로 힘 있게 탁탁 두드리신 후 말갛게 여러 번 헹궈 열을 지어 빨랫줄에 걸어 말리시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면 희디 흰 광목이불 호청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나무꾼이 감춘 선녀의 날개옷처럼 아름다웠다.

빨래 사이에 턱을 궤고 앉아 있노라면 향기로운 풀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느새 아라비아 공주가 되어 하늘하늘한 흰색 모슬린 장막에서 부채를 부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다.

빨래가 잘 마르면 곱게 쑨 밀가루 풀로 푸새를 한다. 이렇게 하면 올이 서면서 호청이 빳빳해져 구김도 잘 안가고 때도 덜 타게 된다고 하셨다. 꾸덕꾸덕 말랐을 때 빨래에 물을 축인다. 어머니는 물을 입에 머금었다 푹 뿜으셨고 나는 물을 손에 묻혀 착착 튕겼다. 물을 축인 빨래는 대강 접어서 빨랫보에 싸놓고 물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잠시 기다린다. 우리는 빨래의 솔기를 맞추어 다시 접는다. 홑이불처럼 큰 빨래는 두 사람이 같이 잡아당겨 올을 펴 가면서 솔기를 맞추어야 한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균형을 잘 맞추지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뒤로 넘어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빨래를 다시 빨랫보에 잘 싸서 그 위에 올라서서 자근자근 야무지게 밟아준다. 그러면 빨래에 습기가 적당히 번지고 촉촉해지면서 구김살이 펴진다.

우리 집에는 반들반들하게 짙은 밤색으로 윤이 나는 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잇돌과 크기가 자그맣고 예쁘게 생긴 방망이가 있었다. 사실 다듬잇돌은 주로 화강암으로 만들고 대체로 길이 80cm 폭이 15cm 높이가 15cm로서 윗부분의 가운데를 배가 나오게 만든다. 방망이는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고 길이가 35 내지 45cm이다. 둥글고 길게 깎아 손잡이는 쥐기 좋도록 홀쭉하게, 중간 부분은 배가 부르게 만든다. 나는 더운 여름날 차고 시원한 다듬잇돌을 베고 누었다가 입이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혼이 난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은 안면신경 마비에 대한 염려였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빨래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양손에 다듬이 방망이를 잡고 두들기셨다. 어떤 때는 나도 끼어들어 다듬잇돌을 중간에 두고 마주 앉아 맞다듬이질을 하곤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빨래를 때렸다. 어머니는 무조건 힘을 쓴다고 다듬이질이 잘 되는 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다. 어깨와 팔목에 힘을 빼고 장단을 맞추어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손힘이 좋다고 늘 칭찬하셨다. 내 나이 여남은 살적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었겠는가? 딸하고 무엇인가 같이 한다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다. 그럴 때면 만들어 주시곤 했던 진달래 화전, 도토리 묵 등의 주전부리가 오히려 나에겐 다듬이질을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다듬이질은 처음에는 뚝딱뚝딱 소리가 나다가 똑딱똑딱 소리로 바뀌고 나중에는 통통 맑은 소리가 난다. 혼자 다듬이질 할 때는 무거운 소리가 나지만 맞다듬이질을 하면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난다. 어머니와 나는 느리거나 빠르게, 작게 또는 크게 리듬을 맞추어 다듬이질을 하였다. 처음 자진모리로 빠르게 시작된 다듬이 소리의 리듬이 시간이 지나면서 중중모리로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휘모리장단으로 바뀌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 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면 어느새 흥이 나면서 추임새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기에 다듬이질 소리는 아기 우는 소리, 글 읽는 소리와 더불어 가정에서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 세 가지 중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가능하면 내가 짬이 있을 때 다듬이질을 하셨고, 나도 시간만 있으면 어머니와 같이 다듬이질 하는걸 즐겼었다. 다듬이질 사이사이에 빨래를 펴기와 접기를 되풀이 하면서 골고루 힘을 받도록 한다. 오래 할수록 빨래는 풀기가 고르게 베면서 윤이 나고 올이 살아난다. 표면이 매끈해 지면서 현대식으로 그냥 다리미질을 한 천보다 훨씬 구김이 덜 가게 된다. 갓 다듬이질을 한 이불을 덮으면 아련한 풀냄새가 나면서 선득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더구나 움직일 때면 사각사각 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사실 다듬이질은 옷감을 손질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고단한 시집살이와 여성의 한을 신명나게 푸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시에미 마빡 뚝딱/시누이 마빡 뚝딱

시할미 마빡 뚝딱/시고모 마빡 뚝딱”

이렇게 애잔하면서 유머 넘치는 구전 민요도 있다. 한편, 나태주 시인의 시집 `슬픈 젊은 날'에서 `다듬이질 소리'는 특별한 여운을 던져준다. 부잣집 다듬이질 소리는 `다다곱게 다다곱게' 고운 소리를 내고, 가난한 집 빨래는 기운 곳이 많아 `붕덕수께 붕덕수께'라는 무거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부잣집과 가난한 집의 다듬이질 소리가 다르다는 것은 우스갯소리 같이 들리지만, 여유롭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요즈음은 주위에서 다듬이질을 보기 어렵다. 세탁기로 휘휘 돌리면 빨래가 잘 되고 대부분의 경우 다듬이질은커녕 다리미질도 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다듬이질 소리의 운치가 사라진 것이다. 달이 훤하게 밝은 가을날 다듬이질은 특별한 운치가 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이웃 집 개 짖는 소리도 다듬이질 소리에 녹아들어 장단을 맞추듯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한다. 방망이가 자아내는 소리에 내 마음도 같이 울리는 듯, 행복하고 따뜻한 순간들이었다.

어머니는 다듬이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단한 자신의 학업을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까다롭고 완고하신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을 삭이셨을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염원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다듬이질 소리 - 어머니의 사랑과 울분이 승화되어 어린 나와 장단을 맞추던 그 소리는 나에게 어머니 품을 그리는 향수처럼 배어있다. 이제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시고, 흰머리가 듬성듬성하고 주름이 진 딸은 귓전에 울리는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를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추억을 그리워하고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한다. 꿈속에서라도 어머니와 맞다듬이질을 하면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김태임 <전 이화의대동창회장, 중구 동호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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