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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백두대간 산행기(조침령-구룡령 구간)
서울시의사회, 백두대간 산행기(조침령-구룡령 구간)
  • 의사신문
  • 승인 2012.12.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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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호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박상호 부회장
추위·고통 잊게한 붉디 붉은 일출과 설산의 풍경

조침령(鳥寢嶺)….

새들도 산을 넘다 한숨을 자고 간다.

이 다분히 낭만적인 이름에 이끌려, 무데뽀로 지난 11월18일 조침령-구령룡구간의 무박 백두대간산행에 선뜻 뛰어들었다.

올 6월경, 의사 산악회 훈련팀에서 설악산 무박 산행을 시도하여 다녀온 바 있다.

오색에서 출발하여 대청, 중청,소청을 거쳐 희운각,공룡능선, 마등령, 비선대를 거쳐 설악동으로 하산한 그 처참하고 아찔한 추억이 아직도 내 기억창고 한편에 선연히 남아 있다.

그때도 `공룡능선'이라는 다분히 이국적이면서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한 멋진 이름에 끌려,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산행이 일천한 내가 겁대가리도 없이 무박산행에 불쑥 참여하여 그 참담한 경험을 만끽했었다.

당시 그넘의 공룡의 등을 악전고투 끝에 대열에 이끌리다시피 하여 겨우 마친 후, 마등령에서 비선대까지의 그 너덜길을 넌더리 치며 내려왔다.하산 마지막 약 1시간여는 그야말로 무릎을 질질 끌고 내려 온 당시의 기억은, 다시는 무박산행을 감행치 않겠노라는 굳은 다짐을 만들었다.

그러나 웬걸, 그 공룡의 악몽이 서서히 이쁜 추억으로 변해 갈 즈음 고등학교 동기산악회 멤버들의 2회에 걸친 백두대간 산행을 홈피에서 곁눈질한 나는 다시금 새들이 잠들고 넘나든다는 아주 나긋나긋한 이름의 조침령 산행의 유혹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토요 진료를 끝내고 집에 와서 짐 좀 챙기고 식사하고 나니 처음 계획했던 1∼2시간의 취침 계획은 그냥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새벽 2시40분경 들머리인 조침령 터널 입구에 도착하였다.출발은 고통 속의 쾌감이랄까 그런대로 좋았다. 우측 볼만 연속적으로 때리는 쇠나드리 고개의 매서운 바람의 고통도, 눈을 들어 심호흡 할때마다 와르르 내 얼굴에 쏟아지는 수많은 별들 덕에 고통은 환희로 상쇄되고도 남았다.폐부 깊숙이 들이차는 신선하고 매쎄한 겨울 새벽공기 또한 몸 구석구석 세포에 쌓여 있던 온갖 오염물질들을 일순에 정화하고도 남는 기분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능선 분기점인 1080 봉까지 갈때 까지만 해도 난 몰랐다.

이젠 1000미터 이상 고봉을 넘었으니 얼마 안가 1200여미터의 그날 산행의 최고봉인 갈전곡봉까지만 고생하면 이날의 산행은 널널할 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웬 봉우리들이 파도 밀려오듯 줄줄이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것 아닌가. 한 숨 돌릴만 하면 눈앞에 나타나는 산봉우리, “이제는 제발…”하면 다시금 오르막 봉우리….

가운데 산악회장인 동기는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네요.(실상은 힘이 넘치는것 같았는데…) 사진 우측의친구는 아주 여유 만만한 표정입니다. 입에 사탕을 물었나?
이렇게 봉우리 파도타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그야말로 심신이 널부러져 모든게 귀찮았다.

뒤에서는 동기회 산악회장의 하품소리도 들리고 그 전염력 덕에 나도 연신 하품이 나오고 걸어가면서도 눈이 감겨 온다. 아! 조난 당했을때 이래서 죽나보다 하는 불순한 생각이 언뜻 들었다.

산악회장인 동기가 온도계를 들여다 보더니 영하 8.4도라고 한다.

살을 에는듯한 바람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15도이하는 되는 듯하다. 손끝의 감각까지 얼얼한 이 상황에서 참을 수 없이 연신 하품하는 기이한 경험들을 해 보신적이 있으신가.

연가리골 샘터에 다다르기 직전의 능선산행 도중, 저멀리 산봉우리에서 불쑥 올라오는 붉디 붉은 일출의 장엄한 장관은 마취인양 일순간 고통을 잊게 해주고 내게 정기를 채워 준듯 하였다.

연가리골 샘터에서 입맛은 없지만 생존을 위한 약간의 아침 요기를 한 다음 발길을 재촉한다.물 먹은 솜덩어리 같은 육체는, 곧 도착될 왕승골 갈림길에서 낙오자와 뒤처진자들을 위한 B코스로 내려가라는 준엄한 지령을 뇌리에 지시한다.

드디어 왕승골 입성. 간혹, 친구의 한마디 격려는 새로운 힘을 창출케하고 더불어 오기를 충동질 한다.회장인 동기가 언제 이곳에 다시 올것이냐며 나를 독려 하고, 일찍 내려가야 뭔 할 일 있냐는 또 다른 동기의 꼬임에 결국 완주팀에 합류하였다. 잠시 쉬는 와중에 연거푸 2잔 들이킨 위스키 덕분이었을까 갑자기 다리 근육이 풀리며 몸이 사뿐해 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니 다시금 주변 풍경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음지와 양지가 이렇게 차이가 날까 새삼 놀랐다.수없이 오르내리는 산봉우리에 음지에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들로 눈꽃 산행의 운치를 흠뻑 느꼈고 양지에는 아직 산죽들과 키 작은 잡목들이 가을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눈꽃 산행의 절정은 갈전곡봉에 이르면서 하산 내내 멋진 설산의 풍광을 보여 주었다.아마도 이 멋진 한폭의 설산 풍경이 없었다면 일찍감치 중도 하차 했을지도….

드디어 1204m의 갈전곡봉에 도달하여 모처럼 성취감의 기쁨을 맞보는 것도 잠시, 그 이후로도 물밀듯이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의 연속. 아, 정말 짜증났다.시간상 거의 끝물인거 같은데도 계속 오르막 내리막이 연속 펼쳐진다.

고개 들어보니 발목같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우리와 반대로 내려오는 한 등산객이 보인다.

“아저씨, 요기만 넘으면 넘어야 할 봉우리는 이제 없나요?” “몇개 안남았어요, 금방이야요”라는 아저씨의 덕담을 들으며 남아 있는 원기를 쥐어짜 올라간다.

그러나 몇개 안 남았다는 그 봉우리는 왜 이리도 또 나타나는지. 산행내내 호흡을 맞추어온 과묵한 친구도 이젠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듯, “아, 뭐냐, 이건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언제 끝나는거냐! 도대체!”

“그러게, 증말 징하다 징해!”

아,∼∼ 좋다. 선배님이 건네주신 시원한 얼음 맥주 단숨에 들이키고, 바늘로 콕 찔러 쪽빛 물감 와르르 쏟아지게 하고픈 눈부신 하늘아래, 구룡령 백두대간에 내가 왔노라…
후반 산행은 고통과 후회가 교차되는 그야말로 악전고투 산행이었다.B조로 내려 갔어야했어, B조로….

산행 초반의 그 쏟아지는 별들에 대한 감흥도, 터질듯이 벅차오른던 일출의 감동도,그리고 서울서는 언감생심 기대하지 못한 함뿍 눈 내린 겨울산의 아름다움도, 이 모든것들도 뇌리에서 이미 사리지고 고통만이 온 몸을 휘돌아 감는다.

내 다음부터 산 이름에 유혹되어 오나봐라, 내 다음부터 무박산행에 참여하나 봐라.혼자 이렇게 씩씩거리며 후회막심의 마음으로 천신만고 끝에 후반산행을 드디어 마쳤다.

10시간의 무박산행….

날머리에서 선배님 몇분이 수고 했다고 어깨를 쳐주며 깡통맥주를 하나 내 주신다.

얼음장 같은 맥주가 단숨에 식도를 타고 내려가 허기진 위를 한바퀴 휘돌아치니,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조금전까지만 해도 목구멍 끝가지 올라온 후회막심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 이 얼음장 맥주 한잔에 변심하는 이 인간의 간사함.

그 이후 뒷풀이와 버스 안에서의 돌고 도는 술 잔에, 얼마 안있어 그대로 녹초가 되어 비몽사몽을 헤멘다.종착역인 압구정에 도착하니, 이날 산행을 책임진 등반대장인 동기가 긴장이 풀렸는지 가볍게 한잔 더 하자는 제안에 서의산의 단골집인 화사랑에 들려 소주 각 일병에 막거리 한사발로 지친 심신을 달랜다.징하다 징해…. 집에 가니 12시 반. 그야말로 50시간에 만에 이불 자락을 턱 끝으로 끌어 올렸다.진저리쳐진 그 악몽의 봉우리들이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하거만, 일주일 좀 지난 오늘, 새록새록 그날의 멋진 설산의 풍경과 추억들만 뇌리에 침착되고 고통의 기억들은 채에 걸러지는 모래들 처럼 사르르 사라진다.

그날, 눈 쌓인 설산에 어렵사리 한발짝 한발짝 찍고 내려온 발자욱들이 내 가슴에도 오랫토록 남아 있는 한, 다시금 무박 산행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도 그리 녹녹한 일만은 아닐 듯 싶다

눈 감으니, 새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날의 갈전곡봉이 눈 앞에 아른거르며이제는 제법 콧노래까지 절로 나온다.

하얀 눈위에 구두 발자국∼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누가 누가 떠났나 떠∼나갔나 외로운 길에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박상호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중랑·박상호소아청소년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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