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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치오〉 작품번호 1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치오〉 작품번호 1
  • 의사신문
  • 승인 2012.11.2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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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198〉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을 통해 무한한 기교의 가능성을 실험했고, 직접 이를 실현해낸 의지의 음악가로서 완전한 명기교파의 표본이었다. 그는 작곡보다는 연주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가 작곡한 곡 중 상당수는 악보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연주회에서 악보보다는 즉흥적인 연주를 즐긴 그는 작품들에는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이 배어 있다.

고도의 기교가 담긴 그의 연습곡들은 바이올린니스트는 물론 피아니스트의 기교연마 확장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중에서도 여러 음악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작품이 바로 〈24개의 카프리치오〉이다. 이 작품의 아름답고 화려한 마지막 곡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에게 영감을 주어 그 주제를 기초로 작품을 쓰게 하였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솔로 피아노를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6개의 연습곡〉을 작곡하였으며 이 6곡 중 제3곡을 제외하고는 〈24개의 카프리치오〉에서 주제를 인용했다. 또한 파가니니 바이올린협주곡 제2번 〈라 캄파넬라〉의 제3악장을 피아노로 편곡하여 만든 〈파가니니 풍에 의한 화려한 대 판타지아〉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비르투오소적인 걸작이다. 또한 쇼팽은 이 작품에서 매곡마다 예술적 아름다움 외에도 특정한 기교연마의 목적을 위한 연습곡을 썼고, 슈만도 〈파가니니 카프리치오에 의한 6곡의 연습곡〉을, 형식미와 절제미를 추구했던 브람스조차도 기교연마를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했고 마지막 낭만파 라흐마니노프도 이 곡의 24번째 곡을 주제로 하여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작곡했다. 이렇듯 이 작품은 낭만파 거장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던 초절적인 명곡으로 바이올린 곡의 매우 색다르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주는 걸작이다.

`카프리치오'는 이탈리아어로 `변덕'이라는 뜻으로 활달하며 느슨한 구조의 형식을 의미한다. 이는 16세기에도 칸초네, 판타지아, 리체르카레 등 다소 기묘했던 새로운 양식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바로크 작곡가들은 건반 카프리치오를 통해 푸가 기법을 표현하였고 다양한 변주도 표현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로카델리의 〈24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치오〉는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치오〉의 모델이 되었다. 베버, 멘델스존, 브람스 등도 많은 피아노곡들을 〈카프리치오〉라 이름 붙였고 차이콥스키는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를 썼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페인 카프리치오〉를 작곡했다. 스트라빈스키가 피아노협주곡을 카프리치오로 구상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마지막 오페라의 제목을 〈카프리치오〉로 붙였다.

1782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 하루 10시간씩 연습하였는데 파가니니가 연습을 잘 안하면 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파가니니의 연주여행을 동행했던 에른스트는 “그는 엄청난 연습을 했음에 틀림없으며, 어떠한 어려운 악구라도 반드시 성공해 내는 강철 같은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신기에 가까운 탁월하면서 상식을 뛰어 넘는 연주기교 때문에 그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 테크닉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겨져 있는데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절묘한 대비, 하모닉스의 효과, 2중 트릴, 화음의 연속적인 연주, 왼손 피치카토 등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고난도 테크닉이었다. 파가니니는 일반인과 달리 어깨뼈와 아래팔, 손목뼈까지 매우 부드러웠으며 손바닥의 관절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한다. 연주할 때 손바닥은 평소 상태의 2배까지 벌어졌다. 이런 모습으로 상상을 뛰어넘는 그의 기교를 본 세상 사람들은 파우스트처럼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대가로 불세출의 연주력을 얻었다고 믿었다. 로마 교회는 그가 악마의 제자로서 믿기지 않는 인간의 솜씨로 대중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죽었을 때 유해는 성 레파라타 거리의 별장에서 방부 처리되어 입관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주교가 그를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고 매장을 거부하여 그의 유해를 매장하는 데 1년 이상을 늦추게 되었다. 결국 그의 이름은 교회 기록부에서도 말소되었고 오늘날 그의 시신은 파르마에 매장되어 있다.

■들을만한 음반: 루지에로 리치(바이올린)[Decca, 1959]; 살바토레 아카르도(바이올린)[DG, 1971]; 마이클 레빈(바이올린)[DMI, 1958]; 이차크 펄만(바이올린)[EMI, 1972]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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