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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설악산 12선녀탕 계곡을 다녀와서〈하〉
서울시의사회 설악산 12선녀탕 계곡을 다녀와서〈하〉
  • 의사신문
  • 승인 2012.10.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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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호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박상호 부회장
선녀들을 위한 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흠뻑 취해

아, 드디어 12선녀탕 시작을 알리는 계곡으로 들어선 것이다. 설악산이 품고 있는 수많은 계곡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12선녀탕은 대승령(1260m)과 안산(1430m)에서 발원하여 인제군 북면 남교리까지 이어진 약 8km 길이의 수려한 계곡으로 폭포수와 탕과 그사이를 누비는 암반수와의 현란한 조화가 보는 이의 혼을 빼놓기 일쑤다.

드디어 눈 앞에 영롱한 유리알 계곡물들이 반갑게 시야에 들어선다. 계곡 최상류에서의 “탁족만리류”라…, 만리나 흐르는 물에 발을 씻어 세속의 때를 없애 볼 요량으로 자리를 물색하던 중, 친구들 사이로 보이는 6∼7분의 여자 일행분들이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는 탁족을 즐기시며 막걸리를 한잔씩 하고들 계셨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듯 보였다.

조금 앞서 간 김세헌 선생님이, “어이구, 아주 맑은 상류에 자리을 잡으셨네요∼” 라며 인사말을 건네자, 일행 중 한분이 다정하게 화답한다.

“이리들 오셔서 살얼음 살짝 덮힌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하고 가세요” “아, 네.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나요? 감사합니다”라며, 나는 한달음에 그분들 일행속으로 합류했다. 사각사각 얼음이 살짝 얹힌 노로소롬한 막걸리를 단숨에 들으킨다. 3시간여의 산행 끝에 타는 목마름으로 한잔의 막걸리가 식도를 통과하여 위에 다다르니, 가슴켠에 싸한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아∼ 좋다, 좋아!” 입에서 잔을 떼자마자 한분이 맛깔스런 낙지볶음과 야채를 한 웅큼 입안에 넣어주시니 그 맛 또한 별미다.

한켠에 서서 그림같은 이 정겨운 광경을 감상만 할 뿐 망연자실 서 있기만 하시는 김세헌 선생님께 나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여러차례 권하건만 기어코 사양을 한다.

하산 후의 그 한 잔의 막걸리 맛에 오점이 남을까봐 참는다. 역시 자제력이 대단하셔. 몇 잔 더 들이키고 싶은 목젖의 욕구를 억누르고 아쉬운 발길을 뗀다.

술도 좀 얼큰해지고 다시 발바닥이 불이나 족탕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는다. 뒤를 보니 샛노란 쟈켓을 입으신 박윤석 선생님이 뭔 상념에 사로 잡히신 표정으로 혼자 내려오시다 우리와 반갑게 조우하고 셋이서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아직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 이건만 용광로에 달군듯 후끈거리는 발바닥도 설악의 차디찬 계곡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듯 금세 소름이 끼쳐 채 1분을 견디기 어렵다. 후끈거리던 발을 찬 계곡물로 도닥인 후, 다시금 씩씩한 걸음을 걷다보니 드디어 탕과 폭포들이 기운찬 굉음들을 내며 마치 용트림 하듯이 기세좋게 내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히 말이 필요없는 장관이다!. 그 높이와 탕의 깊이, 면적에 따라 그 소리도 각양각색이어서 내달리는 물소리만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한다. 계속 이어지는 탕과 폭포들이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이 마치 생명을 지닌듯 서로 얽히고 설키며 서로를 희롱하며 노니는 듯 하다. 때로는 떼를 지어 일렬로 좁은 암반위을 휘돌아 내달리고, 때로는 웅장한 굉음과 함께 거칠것 없이 벼랑으로 떨어지며 눈부신 수정가루들이 활짝 펴진 부채살 모양으로 공중에 흐트러진다.

탕에 이르러서야 이윽고 그 거친 숨을 고르며 찬연한 옥빛 소를 만들지니, 과연 보는 이의 숨을 멈추게하고 눈을 부시게 한다.

넋을 잃고 내려가다, 국수다발 같은 새하얀 암반수가 매끈한 암반위로 잽싸게 내달리다 숨 쉴 여유도 주지않고 미끄럼을 타듯 치달리며 와폭포(누워있는 듯한 폭포)를 형성하고는, 또 한 숨 돌릴 여유도 없이 60도 각도의 내리막을 한번 더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이 멋진 폭포가 두문폭포란다.

이곳을 지나 얼마되지 않아 급경사의 바윗길을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고 나니 드디어 12선녀탕 중 최고의 백미로 꼽히는 복숭아탕(용탕)에 이르른다.

오호! 명불허전이라! 그 이름이 과연 허세는 아니로다!. 암반을 마치 복숭아 모양의 틀로 찍은 후 조각칼로 정교하게 파 낸듯 선명하고 깨끗하다. 투명하게 빛나는 탕의 선명한 진녹색이 그 깊이를 가늠하게 만들었고 장엄하지는 않지만 탕으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굵은 물줄기 다발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폭포수를 날렵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탕의 한쪽 모서리에 급히 꽂히며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몸을 비트는 신비한 자태는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과연 이곳이야 말로 인간의 손길을 떠나 선녀들만을 위한 자연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따사로운 햇빛을 무시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보름달만이 눈부신 칠흙 같은 한밤중, 바위뒤에 숨어 까치발을 한채 고개를 빼곶이 쳐들고 아리따운 그녀들의 목욕 모습을 훔쳐본다. 살곰살곰 맨 발로 다가가 벗어놓은 옷 한벌을 훔쳐 줄랑행을 친다. 눈을 뜨니 벌건 대낮. 보고 싶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사족을 달 이유가 있겠는가?

◇응봉폭포.
아마도 선녀들도 처음에는 남교리에 가까운 응봉폭포 근처에서 목욕을 즐기다, 호기심 많고 짖궂은 동네 청년들의 등쌀에 못이겨 복숭아탕까지 올라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오늘도 수많은 남정네들의 눈길, 손길이 닿았으니 언제 이곳을 피해 새로운 13선녀탕이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다.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암반과 물살들의 온갖 기교와 어우러짐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내려오니 지루함이 전혀 없다. 너덜길이 지루하다 싶으면 부드러운 육질의 흙길이 피곤한 발바닥을 주물러 준다. 시원스레 뻗어 올라간 소나무, 전나무, 잡목들과 아직도 초록을 머금은 싱그런 잎새 사이로 언뜻 보이는 쪽빛 하늘이 경이로운 조화를 이루어 정신을 맑게 해준다.

탕수동 계곡이라고도 하며 맑은 탕이 12개라 해서 12선녀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8개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디가 무슨 탕이고 소인지 확실히 구별이 안되고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안내판들이 눈에 안띄어 지도상에 하류쪽에 보이는 응봉폭포를 알아 보지 못하고 하산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지금은 계곡도 잘 정비되고 인공의 손길들이 많이 미쳐 위험한 곳은 예쁜 목조다리와 목조데크들로 정비되어 비교적 안전한 산행 코스였으나, 1968년 가톨릭의대 산악부 회원 9명 중 7명이 이곳에서 급류와 탈진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니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당시는 얼마나 험준한 산행코스였는지 가늠이 간다. 그래도 등산 매니아분들은 이런 인공의 손길로 인해 자연의 그대로의 계곡산행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하시는 분들이 많다.

드디어 장장 6시간20여분에 걸친 산행끝에 남교리 관리소에 도달하니 바로 옆에 우리 회원들을 위한 식사장소가 마련되었다. 이미 많은 회원분들이 산행의 피로와 허기를 달콤한 닭도리탕과 부침개로 달래면서 그날 산행의 주제를 안주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고, 하산 후 한켠에 남아 있는 아쉬움을 한잔 술로 달래고들 계셨다.

산행 내내 하산 후의 냉막걸리 한잔 걸치는 맛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신 김세헌 선생님은 냉큼 달려가셔서 손수 옥수수 막걸리를 사오신다. 술판 분위가 늘상 그렇듯, 결국 막걸리가 기폭제가 되어 소주, 맥주등 주종에 상관없이 들이키다 보니 오고가는 술잔이 가속이 붙어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은 물을 만들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나니…” 인간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위대하다.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라. 꽃향기는 백리를가고 술향기는 천리를가며,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옛말이 하나 틀릴게 없다. 오늘, 이 12선녀탕 산행을 함께 한 인연들의 향기는 저 멀리 멀리 만리길까지 퍼질 것이다.

내 비록 야간 산행을 못해 선녀들이 꼭꼭 쟁여놓은 옷가지들을 훔쳐오지는 못하였어도, 순결하고 단아하고 한편으론 발랄하고 상큼한 그 선녀들의 깔깔거림과 재잘거림을 귀에 담았고, 그녀들의 물장난 몸짓과 하늘거리는 천의를 입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왔으니 이것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동안 중청봉, 대청봉, 귀때기 청봉, 공룡능선 등 칼날같이 찌를 듯 한 수려하고도 웅장한 능선들을 등정하며 남성적인 설악을 느껴봤다면, 이번엔 설악이 깊숙이 감추어 놓은 내밀한 속살을 음미해 본 산행이었다.

12선녀탕! 그 이름부터 설레임을 주는 이 수려한 계곡의 풍광은 내 추억의 창고에 고스란히 기억되면서 내 마음에 늘 마르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것이다. 보고싶음은 또 다른 그리움을 만들고, 이 모든 그리움은 설악의 품안 곳곳에 오롯이 존재할 것이고 언제라도 헤쳐보면 그 그리움은 추억으로 새록새록 내게 다가올 것이다.

초가을 휴일! 난 설악에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제끼고, 속세를 떠나 일탈의 즐거움을 한껏 즐긴 호사스런 하루였다!

“나는 산이 좋더라 / 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 / 나는 산이 좋더라 / 꿈을 꾸는 듯 / 멀리 동해가 보이는 /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전교준 `설악 얘기' 중 마지막 구절-
(참고로 전교준 시인은 작고 하셨지만 필자의 고등학교 16년 선배이시고, 서울고 산악반 출신이시다)

박상호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중랑·박상호소아청소년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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