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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호 특집 때 `기쁨과 보람' 생각나 감개무량
4000호 특집 때 `기쁨과 보람' 생각나 감개무량
  • 의사신문
  • 승인 2012.09.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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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신문 5000호 기념 특집 - 주제Ⅱ : 의사신문과 나

한광수 전 국제보건 의료재단 총재
역대 발행인으로서의 나 - 한광수 전 서울시의사회 회장

아침에 배달 된 의사신문 4996호를 앞에 놓고 보니 의사신문과 나 사이의 지난시절 추억들이 새삼 그립게 밀려든다.

나는 벌써 21년 전인 1991년 4월, 제 24대 서울시의사회 이상웅 회장 집행부의 부회장 겸 의사신문의 부사장으로서 의사신문과 첫 인연을 맺었다. 공보이사 최차해 박사가 편집인으로 계셨고, 이상웅 회장이 사장으로 상근하셨기에 부사장인 나는 신문사 식구들과 자주 단합대회를 갖는 게 주 업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사 형편이 괜찮아서 분위기도 넉넉했었다.


2000년 4월 서울시의사회장에 선출되면서 당연직으로 의사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내가 취임한 2000년은 의약분업 반대투쟁으로 의료계가 몸살을 앓던 때였고, 몇 년 전부터는 의약계전문지들이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나는 회장 취임 전 3년동안 의협신문 편집인을 맡았었는데 신문사 모든 경비를 절감하고 기자들 수당까지 삭감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무렵 의사신문의 중견기자들이 신문사를 떠난 것도 경영난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시의사회 일반 회계에서 의사신문사를 위해 지원하는 신문발송비와 보조비등이 점점 늘어나자 대의원회에서는 심지어 의협신문이 있으니 의사신문은 폐간하자는 과격한 발언이 먹혀들 정도가 되었다.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약업계 전문지에서 경영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던 목진일 전무를 전격 영입해서 경영을 쇄신함과 동시에 직접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지난 3월에 회장 임기를 마친 나현 회장이 당시 총무이사였는데, 나는 총무이사와 목 전무를 대동하고 제약회사 CEO 들을 일일이 찾아 취임인사를 했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의약분업대란으로 구속되어 옥고까지 치른 직후라 모든 CEO들이 반갑게 대해주었고, 이후 상당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니 신문사 직원들의 대우도 개선 될 수 있었고 신문사 집기와 PC도 전부 교체하고 편집기도 마련했다.

낡고 비좁았던 5층 강당 동아홀을 리모델링해서 2층으로 멋있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은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지원을 받은 이병훈 부사장의 노고 덕분이다.


2000년 의약분업 투쟁의 혼란 시절에 의사신문 사장 맡아
경영난 해소 노력·회원 명부 첫 발간 등 모두 소중한 추억


의사신문사장 임기 중 나는 신문사와 관련된 의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가졌다.

제일 뿌듯했던 일은 창간 40주년 기념식을 주관한 일과 지령 4000호 기념호를 발간한 일이다.

의사신문은 4.19 혁명 나흘전인 1960년 4월 15일에 창간되었다 이듬해 5.16혁명으로 수많은 간행물이 폐간될 때에도 의연히 살아남은 의료계 제일 고참 전문지이다(의협신문보다 일곱 살이 더 많다).

지령 4000호 기념 특별호는 그때까지의 전문지로서는 처음으로 100페이지 짜리로 찍었다.

나는 임기 중 100페이지 짜리 대형특집을 여러 번 낸 것을 매우 보람있게 여기면서도, 그런때마다 신문사 직원들을 괴롭힌 것을 지금까지도 미안하고 고맙게 여긴다.

또한 서울시의사회의 기관지라는 우월적 지위를 갖고, 광고업계 파이가 넉넉지 않던 시절 다른 전문지들에게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준 일도 송구스럽게 여기고 있다.

내가 2000년 4월에 제 27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보니, 서울시의사회는 1915년 12월 1일 창립 이래 한 번도 회원명부를 낸 적이 없었다.

확보한 예산이 없다보니 유수한 제약회사 몇 군데에 회원명부 발간 협찬을 구해 보았는데 반응이 냉담했다.

궁리 끝에 남달리 친한 사이였던 유한양행 손경오 전무를 직접 만났다. “서울시의사회 회원명부 발간을 지원해주면, 그 명부에는 오로지 유한양행의 광고만을 싣겠다” 는 나의 제안에 화끈한 성격의 손 전무는 두말없이 응해주었다.

명부 1만3000부를 발간해서, 발송까지 맡았으니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텐데도 시종 싱글벙글이다. 표지에 유한양행 상징인 버드나무를 비롯 안팎으로 광고를 독점했기에 회사차원에서도 대만족이었다고 한다.

최초로 나오는 회원명부에 서울시 의사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회원명부에 등재되지 않는다는 내 엄포에 모처럼 회비 납부율이 올라서 의사회 살림도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듬해부터는 의사신문사에서 회원명부 발간 사업을 맡게 하고 수익까지 올리도록 밀어붙인 것도, 신문사 식구들을 못살게 군 일중 하나다

창간 4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했고, 전무후무하게 부사장을 거쳐 사장이 되었던 내가 지령 4000호를 기념해서 최초로 100페이지 짜리 특별호를 발간했는데, 이제 지령 5000호 기념 특집호에 글까지 쓰게 되니 참으로 감개무량 하다.

생각할수록 꼭 한 가지 아쉬운 일은 의사회관 근처에 3층짜리 건물을 의사신문사 사옥으로 매입하려고 했을 때, 신문사 식구 모두가 반대해서 할 수 없이 뜻을 접은 일이다.

매주 한번씩은 신문사 사무실에서 돌솥비빔밥 점심을 다함께 먹곤 했는데, 4층까지 그 무거운 점심상을 머리에 이고 오르내렸던 밥집 아주머니한테, 사장 임기 마지막 해에 설치한 엘리베이터 덕에 고생을 면하게 해드린 일은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추억이다.

한광수 (전 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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