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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계의 영원한 스승, 의학박사 - 정진우 
피아노계의 영원한 스승, 의학박사 - 정진우 
  • 의사신문
  • 승인 2012.06.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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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출신 음악가, 한국 가곡 발굴·창작곡 활성

정진우(鄭鎭宇)
정진우(鄭鎭宇)는 1928년 평양에서 정수영과 지수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건반악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집에 풍금이 있어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를 치기 시작했으며, 평양 남산소학교의 남궁요한나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후 평양사범학교와 평양제일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아베 야스시(阿部靖)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얻어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피아노치기에 몰두한 가운데 소학교를 마친 선생은 경쟁률이 높은 평양 제이중학교(구 평양고보) 입학시험을 통과해 중학생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음악이었으나 결국 부모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정진우는 1945년 제이중학교 졸업과 함께 평양의학전문학교로 진학을 해야 했다. 평양의전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음악광' 또는 `피아노광'이라는 의학도로서는 색다른 별명을 얻었다. 평양의전 시절 그는 한 학년 위의 임진우(전 고려병원 심장연구센터 책임자)를 만나 음악친구가 되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난 임진우는 성악가를 꿈꾸고 있어 평양의전 내에서 성악과 반주로 둘은 급속히 친해졌다. 뿐만 아니라 임진우는 1946년 선생이 월남할 때도 의기투합하여 함께 사선을 넘었다.

서울로 온 선생은 이번에도 아버지의 생각대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이곳에서 정진우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음악가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성악가 서영모와 서울합창단을 지휘하던 최희남 등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문음악인의 반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직업합창단인 서울합창단의 피아니스트가 되면서 연주회며 방송이며 지방순회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그는 의과대학생으로서의 본분보다도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의과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내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내과 과장이 필자의 친정아버지인 장경 교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필자는 광복 이후 정진우 선생에게 잠시 피아노를 사사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특히 그의 생애에 커다란 상처와 용기와 변화를 주었다. 적 치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정진우는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강원도 성지봉 전투에서 포탄과 폭설 속에서 발에 동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육군병원에서 퇴원명령을 받은 정진우는 1951년 육군대위로 명예제대 특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안병소 선생을 만나 음악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피난지 부산에서 첫 독주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후 그에게는 각 매스컴에서 `소생한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절망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신문기사는 물론 드라마로 꾸며지기도 했다. 퇴원하고 1년 남짓 의원을 개업하기도 했던 정진우는 이 연주회를 계기로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 정진우는 실험악회(서울실내악회 전신) 일로 자주 만났던 지휘자 임원식의 조언을 받아들여 1957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을 떠난다. 비엔나 콘서바토리에서 한스 베버 교수를 사사한 정진우는 그로부터 기교도 기교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열정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1959년 현제명을 만나 서울대 음대 전임강사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최영우, 첼로의 전봉초와 함께 `서울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운동에도 앞장 섰다. 이때부터 그의 반생은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교육이란 그 내적 공간 속에서 오로지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만이 있는 것이며, 더욱이 음악교육이 그렇듯이 피아노 교육 역시 일 대 일로,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스승과 제자의 인간적인 교감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삶도 게을리하지 않아 독주자로서는 물론 가곡 반주자로서, 특히 바리톤 오현명과의 가곡 발굴과 우리 창작곡의 활성화를 기한 것은 업적 중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늦깎이로 의학공부에 재도전, 1973년 45세의 나이에 `일정한 음악이 정신과 환자에게 미치는 정서 반응'이라는 논문으로 가톨릭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순의 나이가 가까워서 그는 우리 음악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1982년에 `피아노음악'이라는 음악전문잡지를 창간하였다. 이후 2002년에는 현악전문잡지 `스트링 앤 보우'도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피아노 음악계의 큰 스승에서 이제 음악잡지를 창간, 보급하여 한국음악계의 영원한 스승으로 자리매김하며 정진우 그는 83세의 오늘도 서울대 명예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집필 : 장혜원(서울종합예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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