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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D장조 
  • 의사신문
  • 승인 2012.05.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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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을 위하여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철강 재벌로서 빈의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 중에는 브람스, 클라라 슈만,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부르노 발터, 파블로 카잘스 등 많은 음악가들이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집안의 풍부한 예술적 분위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하게 되었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자신의 오른 손을 잃게 된다. 이후 10여 년의 세월을 좌절 속에서 방황했다.

그를 지켜본 스승 요제프 라보는 자신의 제자를 위해 왼손으로만 치는 연습곡을 만들어 그를 격려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왼손 피아니스트'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재기를 결심한다. 라벨을 비롯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힌데미트 등에게 자신을 위한 작품을 위촉하게 되는데 그들 중 라벨은 왼손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이 곡을 작곡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제안에 흥미를 느낀 라벨은 “양손을 위한 작품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전통적인 협주곡보다 경건한 종류의 스타일에 의존하였고 단일 악장 형식으로 재즈의 효과를 접목하였는데 이런 작품은 본질적으로 두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처럼 가뿐하면서도 섬세하며 치밀한 효과를 창조해 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이 곡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을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왼손만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취향에 안 맞는다며 라벨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라벨에게 “연주자는 작곡가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저항하였고 반대로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응수하며 한 음표의 수정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작품을 완성한 라벨이 비트겐슈타인의 저택에서 연주를 한 것에 대해 훗날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나는 그의 작품에 압도되지 않았다. 나의 태도를 보고 라벨은 아마 많은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연습을 거듭하면서 비로소 나는 이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하였다.

일반적으로 한 손으로 연주를 한다고 하면 많은 음표를 연주하지 못해 다채롭게 음색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협주곡에서는 엄지손가락이 멜로디를 주도하면서 라벨이 의도한 음색과 프레이징 모두를 두 손으로 연주한 협주곡 못지않게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저음의 깊은 음향조차 오른손을 보완하기 위해 두터운 금관악기는 타악기군의 오케스트라 음향과 완벽한 아름다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1931년 파리에서 완성된 후 비트겐슈타인의 독주와 함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이 곡은 단 악장으로 알레그로의 주부를 끼고 전후의 느린 렌토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왼손을 위한 단 악장 협주곡이지만 이와 같이 변화난측한 극적인 표현으로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난곡도 드물 것이다. 제1부 Lento Andante 고뇌에 찬 신비스러운 처음 도입부에서부터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흐른다. 이는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적 환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전곡의 주요한 두 주제를 각각 콘트라파곳과 호른으로 제시하게 되는데 도입부 전체가 페달 음을 유지하며 피아노의 카덴차가 연주되면서 점점 분위기는 고조된다.

중간부에 접어들면서 전쟁에의 우울과 비극적 침묵이 어슴푸레 스미면서 안단테로 변한다. 제2부 Allegro 금관과 타악기에 의한 야성적 역동을 나타낸 행진곡풍의 리듬을 연주하고, 고음역의 피콜로와 하프가 익살스러운 도약 후 파곳이 노래를 한다. 피아노, 비올라와 첼로, 트롬본과 오보에 등으로 악기가 교체되고 주제 변형이 긴박하게 전개되면서 렌토로 들어가게 된다. 제3부 Tempo primo 도입부 없이 피아노의 긴 카덴차 후 관현악과 피아노가 어우러지면서 마지막에 열기에 찬 풍자적 경련이 나타나다 강하게 끝을 맺는다.

■ 들을만한 음반: 상송 프랑수아(피아노), 앙드레 클뤼탕스(지휘),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EMI, 1960]; 알프레도 코르토(피아노), 샤를 뮌슈(지휘),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EMI, 1939]; 크리스티안 침머만(피아노), 피에르 블레즈(지휘),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DG, 1987]; 미쉘 베로프(피아노),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DG, 1988]

오재원〈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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