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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부외과의 개척자 - 한격부
흉부외과의 개척자 - 한격부
  • 의사신문
  • 승인 2012.04.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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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회관 건축·세계의사회 진출 등 의권수호 앞장

한격부(韓格富)
사석(捨石) 한격부(韓格富)는 1913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東京府立)제4중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였으나 경제사정 때문에 일본에서의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그해 경성제대 의학부 예과에 입학, 1941년 경성제대의학부를 졸업했다.

졸업하면서 모교인 경성제대부속병원 제1외과학교실 부수(副手)로 남은 선생은 1944년 동기중 유일하게 조수(판임관 7급)로 정식 임명받는 등 촉망받아 오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혼란기에 병원장대리직을 맡아 일본인으로부터 병원을 인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조교수로 임명받은 선생은 일반외과를 맡아보면서 임파선결핵연구와 폐결핵의 외과적 치료 등 흉부외과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흉부외과는 미개척분야로 불모지나 다름없었지만 선생은 후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비록 힘든 학문일지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겠기에 남을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심정으로 흉부외과를 전공할 의지를 다졌다.”고 술회했다. 선생은 이때 내 한몸을 돌처럼 버리겠다는 뜻으로 아호를 사석(捨石)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으로 피난한 선생은 친지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병원을 개업했는데 당시 부산은 물론 경남지역일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지만 1년 만에 과감히 폐업하고 1953년 최신의료장비를 갖추고 진료여건이 좋은 부산 스웨덴적십자병원 흉부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 스웨덴적십자병원에서의 근무가 인연이 되어 1956년부터 1년반 동안 스웨덴 카로린스카의대 크라포드연구실과 영국 런던 왕립흉부센터(Royal Chest Center)에서 연수하고 1959년 메디칼센터(국립의료원 전신)가 개원하자 흉부외과 과장에 부임, 2년간 재임하며 우리나라 흉부외과학의 초석을 다졌다. 이렇듯 남보다 일찍 흉부외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불모지였던 이 분야개척에 힘쓴 선생은 1968년 대한흉부외과학회 창립총회에서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한편 선생은 부산피난 시절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틈틈이 부산대학교 문리대교수로 출강하던 중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설립에 주축 멤버로 참여, 1954년부터 2년간 부산대학교 의예과 부장을 맡아 후학양성에도 힘썼다.

1960년 서대문 독립문 근처에 개원한 한격부외과의원은 월평균 개복수술건수가 대학병원의 수술건수를 능가할 만큼 환자가 많을 정도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선생은 개원하면서 의사사회에 불신의 골이 너무 깊다는 것과 또 의권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는 것을 느끼고 구의사회설립을 추진, 1959년 서대문구의사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맡았다. 당시 의사단체로 중앙에는 대한의학협회, 서울시의사회가 있었으나 구의사회조직은 몇몇 구에서만 조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의사회 활동을 시작한 선생은 서울시의사회장을 거쳐(1962∼64) 제20대(1970∼72)와 제23대(1976∼79) 대한의학협회장을 역임하면서 격동기에 의권수호와 협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의협회장 재임시 대표적인 업적은 이촌동 의협회관을 건축, 의협의 이촌동시대를 연 것이다. 전 집행부에서는 당초 예산상의 문제를 들어 1차로 지하1층 지상1층까지 건축하고 추후 예산을 확보하여 추가 건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회장에 당선된 선생은 명실공히 의협의 회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들더라도 처음부터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 당초계획을 바꾸어 7층까지 골조공사에 착수함으로써 현재의 의협회관이 지어질수 있었다. 회관건축공사기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선생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5백만원을 희사하며 공사를 독려했다. 의협은 이같은 선생의 뜻을 기려 회의실 명칭을 선생의 아호인 `사석홀'로 명명했다.

회장시절 또 하나의 기록될 일은 1971년 우리나라 의학계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국제의학제전인 아시아-대양주 의사회연맹(CMAAO) 제7차 총회 및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대외적으로 의협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선생은 의협이 세계의학계에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세계의사회(WMA) 같은 국제기구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1977년 아일랜드 더불린에서 개최된 제30차 세계의사회 총회 때부터 회비를 내고 정식투표권을 행사하기 시작, 세계의사회에서 대한의사협회의 영향력을 높일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선생은 또 재일한국인의사회 창립을 적극 지원하고 의협 해외특별지부로 하여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했다.

선생은 의협회장직을 물러난 후 병원도 폐업하고 상계동에 있는 시립양로원을 1주일에 2회씩 찾아가 진료봉사를 하다가 시립양로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자 1983년 그 자리에 `시립노인요양원'을 설립, 무보수 원장으로 약 20년간 불우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등 2005년 타계할 때까지 여생을 노인복지사업에 힘썼다. 1985년 선생은 스웨덴적십자 공로훈장(1955), 국민훈장목련장(1982), 한국여자의사회 의료봉사대상(1998) 등을 수상했다.

집필 : 백용기(전 대한의사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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