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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2주년 기념수필-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
창간 52주년 기념수필-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
  • 의사신문
  • 승인 2012.04.1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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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임 <중구 동호의원장, 전 이화의대 동창회장>

“아이들의 인생 마라톤, 나는 조용히 지켜볼뿐”

김태임 원장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 중에 흑표지에 검은 색 철끈으로 묶은 오래 된 원고지 묶음이 있다.

요즘은 거의 A4용지에 워드 작업으로 논문이나 숙제를 제출한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는 원고지에 글짓기를 하곤 했다. 철자나 띄어쓰기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곤 했다. 여러 번 지우다가 지우개가 신통치 않아 원고지가 찢어져서 애를 태우곤 했다. 옆의 짝꿍은 일제 지우개로 말끔하게 잘 지우는걸 보고는 부러워했다.

20여년 전 어느 날 퇴근해 집에 오니 평상시에는 보조개를 만들며 방긋 웃으며 인사하던 초등학교 2학년짜리 둘째 딸이 왠지 쭈뼛거리며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내가 글짓기 잘 했다고 칭찬하셨어. 그리고 엄마 꼭 보여드리래.”

“그래 우리 딸 장하다. 어디 보자.”

“숙제해야 하니까, 엄마 혼자 보세요.” 하며 쪼르르 자기 방으로 올라간다. 둘째가 내개 건넨 흑표지의 원고지 묶음을 열어보니 글짓기 제목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는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와 현관 벨을 누르면 울리는 `딩동댕'소리다”로 시작된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올라 오며 목이 메면서 직장을 다니며 세 아이를 키우는 어려웠던 순간들, 기쁨과 보람의 순간들이 마치 고장 난 무성 영화처럼 앞을 스친다.

미국에서 살 때의 이야기다. 큰 딸이 일곱 살, 둘째가 세 살 때였다. 큰 애는 기분이 좋으면 동생에게 동화책도 읽어주고 같이 크레용으로 그림도 그린다. 큰 애가 레고 블록으로 집짓기를 하면 둘째는 옆에서 열심히 보다가 완성되면 손바닥을 치면서 기뻐하곤 했다. 그래도 아이들인지라 별 사소한 일로 내꺼니 네꺼니 투닥거리다가 다투곤 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큰 애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달려가 보니 동생이 자길 물었단다. 자기 인형을 동생이 가지고 놀 길래 달라고 했더니 안 내놓더란다. 빼았었더니 동생이 화가 나서 달려들었고 힘으로 안 되니까 문 모양이다. 팔을 보니 빨갛게 부풀었는데 문 자국이 제법 선명하다. 둘째는 언니가 우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나는지 더 크게 울어재낀다. 우선 큰 애를 달래고 부은 손을 호호 불어주고 상처 덧나지 않도록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 다음에 둘째를 앉혀 놓고 타이른다. 화가 난다고 언니를 무는 법은 없다.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나이 차이로 보아 언니를 힘으로 당할 수도 없고 말싸움으로도 더구나 상대가 안 된다. 엄하게 단속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한 달쯤 지나 티걱태걱 하다가 둘째가 언니를 무는 상황이 재연됐다. 이번에는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과 의논을 심각하게 했다. 여하한 경우에도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물린 언니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동생을 마음으로 부터 사랑하고 사이좋게 지내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다음 날 시간을 내어 큰 애가 다니는 유치원 원장님과 면담을 했다. 설명을 들은 원장님은 몇 번째인가 물으셨고 두 번째라고 대답했다. 원장님은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때 둘째를 같은 방법으로 물어주라고 충고했다. 눈을 크게 뜨고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나의 모습에 원장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동생의 나이가 교훈이나 꾸지람은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별로 피부에 닿지 않아요. 자기가 물린 고통을 직접 느껴야 고칠 수 있습니다. 어렵지만 해 보세요.”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씀이다.

얼마 후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나는 눈 딱 감고 둘째의 여린 팔을 물었다. 큰 소리로 서럽게 울어대는 둘째를 안고 마음속으로 같이 울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에도 엄마는 너를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누군가를 물면 엄마도 너를 다시 물어줄 거라는 모진 말도 덧 붙였다. 그 이후로 둘째는 다시는 언니를 물지 않았다. 지금은 나름대로 썩 사이가 좋은 친구 같은 자매이다.

둘째는 크면서 책을 좋아하고 의젓하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

병원을 하는 관계로 남편과 시간을 조절하여 둘 다 저녁때 동시에 집을 비우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지만 저녁에 꼭 참석해야하는 모임이나 세미나가 있다. 남편과 내가 같이 늦는 경우 나는 전화로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에게 준비과제물 사러 갈 때 1학년짜리 동생 것도 같이 챙겨주고 숙제도 봐 주라고 부탁한다. 둘째는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대답 했고 약속을 잘 지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큰애는 중학교 3학년이라 공부하랴 수업 후 학원 다니랴 바쁠 때였다. 한 번은 둘째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만난 이웃이 이렇게 말했다.

“누나가 동생 손을 꼭 잡고 과제물 사러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는데, 댁의 따님이군요. 기특하다고 생각했어요.” 둘째 손을 지긋이 잡으니 수줍게 방긋 웃는 모습이 마치 햇님 같았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우리 부부는 그들이 TV를 못 보도록 하고 책을 많이 읽도록 유도하느라 상당히 신경을 썼다. 애들은 우리 교육방침을 비교적 잘 따라 주었는데 가끔은 이 문제가 갈등을 일으켰다. 둘째가 중학생일 때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승부와 좌절을 주제로 한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방영 중이었다. 장동건, 심은하가 주연을 맡았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무렵 둘째가 그 드라마를 꼭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다 보고 아침마다 그 드라마가 화제인데 자기만 외톨이가 된 기분이라나. `안돼!`라고 말하려는데 아이가 눈물을 글썽 거린다. 무슨 대단한 교육적인 원칙이라고, 원칙도 아이를 위한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만 허락한다고 하고 아이와 같이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시청했고 아이는 마냥 행복해했다.

`마지막 승부'에서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주제가의 가사이다.

“처음부터 할 순 없는 거야/ 그 누구도 본적 없는 내일, 기대만큼 두려운 미래지만/ 너와 함께 달려가는 거야.”

미래는 누구도 상상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인생이라는 기나 긴 마라톤경기에서 처지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주며 격려하면서 같이 가고 싶다. 아니다. 같이 가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 신서방의 몫이다. 나는 비켜서서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김태임 <중구 동호의원장, 전 이화의대 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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