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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자동차 이야기 - 포르세 (3)
프리미엄 자동차 이야기 - 포르세 (3)
  • 의사신문
  • 승인 2012.04.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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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비틀'

예전에 필자는 폭스바겐 비틀의 이야기를 길게 적은 적이 있었다. 아마 자동차 역사를 통해서 비틀만큼 긴 기간 동안 생산된 차도 없을 것이고(1938년부터 2003년까지 생산되었다) 같은 디자인으로 2100만대가 생산된 차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성공적인 차였다. 디자인 자체가 특별했다.

비틀의 시작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위한 차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독일 국민들이 당시 동경의 대상이던 자동차를 누구나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게 실용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1931년부터 포르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차'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몇 개의 프로토 타입을 거쳐 최종적으로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정책이기도 했던 국민차(volks - wagen, people's car라는 뜻이다)로 채택된다. 소박한 자동차로 두 명의 어른과 세 명의 어린 아이를 태우고 100Km를 낼 수 있어야 했으며 당시 990 마르크정도의 가격으로 당시 주당 30마르크 정도를 받는 노동자가 저축하여 살 수 있는 수준이어야 했다.

히틀러의 조건들은 명확한 설계를 위한 필요조건이 되지 못했으나 1931년의 오리지널 설계는 이미 최종적인 생산버전의 설계와 비슷했다. 그 후 몇 년의 준비 끝에 상업적 대량 생산의 설비를 준비하자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설비는 군수차량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변경되고 민생용 차량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생산할 수 있었다. 높은 차제, 풍뎅이를 연상시키는 차체, 고도의 안전성, 낮은 마력수, 전복되어도 안전한 차체, 공냉식 엔진과 황당할 만큼 쉬운 정비, 덩치에 비해 가벼운 무게, 사막이나 극지에서도 달리고 엔진오일을 30년간 갈지 않았다는 실제 일화, 그리고 광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광고시리즈, 무엇보다도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그 디자인 이미지,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하는 포르세 스포츠쿠페들의 실제 조상이다.

폭스바겐의 생산 코드명은 포르세 60이었다. 회사는 폭스바겐이지만 설계자가 페르디난트 포르세 박사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공랭식 수평대향 엔진이 뒤에 붙어있는 특이한 차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비틀의 디자인은 체코의 Tatra 자동차 회사의 모델 T97에 크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필자에게는 거의 비슷한 자동차로 보였다. 딱정벌레 디자인의 후륜구동 수평엔진은 이미 T97에 구현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독촉아래 포르세는 타트라의 Hans Ledwinka의 어깨너머로 디자인을 베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전시에는 폭스바겐이 큐벨바겐(코드네임 82)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을 바꾸어 생산되고 있었고 미군의 지프차와 전쟁에서 맞붙었다. 차체와 엔진은 그대로였다. 엔진은 23마력 정도밖에 안 나왔으나 1400cc 45마력인 1400Kg 인 미군의 지프에 비해 반 정도로 가벼웠고 연비는 훨씬 좋았다. 연비는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전쟁터에는 주유소가 없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전쟁터에서 라디에이터가 손상되면 달릴 수 없는 수냉식 엔진에 비해 공랭식의 야전성은 두드러지게 좋았다.

혹한이나 혹서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 4륜으로 만들기 위해 무게를 크게 증가시키는 것보다 LSD라는 간단한 장치를 붙인 ZF사의 기어박스는 야전성을 증가시켜 달리지 못하는 곳도 없었다. 포털기어라는 장치를 붙여 지상고도 높았고 야전에서는 밑이 복잡한 미군의 지프보다도 밑바닥이 한 장의 철판처럼 된 큐벨바겐이 더 유리했다. 수렁에 빠져도 썰매처럼 미끄러져서 쉽게 탈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간단하고 가벼운 것은 실전에서도 유리했다. 큐벨바겐을 노획한 연합군은 실전 운영에서 지프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지프처럼 잘 뒤짚히는 일도 적었다고 한다. 전후의 큐벨바겐은 181과 182라는 코드로 198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었다. 몇 만대가 나토의 주력 차량으로 활동했다. 지겨울 정도로 오래 사용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비틀은 SUV의 중요한 조상이라고 볼 수 도 있다.

1950년대가 되자 차들을 다시 생산할 수 있게 된 폭스바겐은 비틀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배기량과 출력을 약간 증가시킨 비틀은 당시의 유럽차들 보다 고속성능도 우수했고 가격도 좋았다. 얼마 후 미국과 유럽에서의 판매량은 경이적으로 늘었고 1970년대에 이르면 세계최대의 자동차회사가 된다. 비틀은 거의 20년 동안 놀라운 판매량을 유지했다. 사막에서 혹한지역에 이르기까지 못 달리는 곳이 없었다.

폭스바겐 비틀의 디자인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요즘에 나오는 차와도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공랭식 엔진과 변속기는 차체의 뒷부분에 있다. 팬이 바람을 일으키면 실린더 옆의 핀을 통해 엔진이 식는 구조다. 엔진의 구조도 수평대향 엔진이라 냉각이 되는 면적이 넓다. 대부분의 차들이 수냉식이며 엔진이 앞부분에 위치하는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구조다.

엔진이 뒤에 위치하고 차체는 모노코크가 아닌 구조라서 차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차대와 차체는 완전히 분리될 수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20개가 안되는 볼트를 풀면 차체는 완전히 분리된다.(필자는 비틀의 엔진 정비는 해보았지만 차체를 분리해본 적은 없다) 풍뎅이의 단단한 껍질이 분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둥그런 껍질은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풍뎅이의 껍질처럼 단단하고 응력을 분산시키는 구조라서 생존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유한 요소법 같은 것을 적용시킨 것도 아니지만 차가 전복되어도 지붕이 내려않지 않아서 탑승객들은 안전했다. 언덕에서 굴려도 그냥 차는 구를 뿐이었다. 전복된 차를 다시 뒤집으면 다시 달리기도 했다. 밑의 철판이자 프레임격인 구조물은 방수장치처럼 작용해서 차가 물에 빠져도 곧바로 잠기지 않는 역할을 했다. 충돌에도 상당히 튼튼했다. 차체가 높지만 무게 중심은 비교적 낮아서 역학적으로도 안전했다. 평평한 차체는 구조적으로 터널처럼 되어있었고 전륜과 후륜의 서스펜션은 토션바로 구성되어 있었고 간단했다. 전륜에는 스태빌라이저 바가 있었고 4개의 바퀴 모두 독립현가 방식으로 볼 수 있었다. 핸들링은 매우 우수했다.

엔진에서 나오는 20마력부터 60마력 정도의 출력으로 만족할 수만 있다면 너무 간단해서 거의 고장 날 것이 없는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 첨단 디자인을 적용하면 연비와 출력을 모두 개선 할 수 있겠지만 메이커들은 아직 이런 차들을 만들지 않는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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