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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핵산연구에 헌신한 - 이기영
오로지 핵산연구에 헌신한 - 이기영
  • 의사신문
  • 승인 2012.03.2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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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생화학 발전 및 후학 양성 초석 마련

이기영(李基寧)
이기영(李基寧, 서울의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기녕'으로 불렀음)은 본관이 우봉(牛峰), 호가 일천(一泉)으로 1914년 서울에서 이병도(李丙燾)와 조남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927년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를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32년 졸업하고, 같은 해에 아버지의 교육방침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의 길에 입문하였다.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의화학교실(현재의 생화학교실)에 부수(副手, 전문학교 졸업자에게 주는 조수 칭호)로 들어가 본격적인 생화학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임교수인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는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최신 학문경향을 습득하고 돌아온 일본 생화학의 권위자 중 한사람이었다.

이기영 선생은 나카무라의 실험실에서 1년 중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 프랑스에서 8년 동안 연구한 나카무라의 파스퇴르식 교육은 훗날 선생이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로 유학 가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나카무라 밑에서 5년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젊은 연구원 이기영은 집념을 갖고 실험에 집중하는 일과 과학자로서의 기질을 익히게 되었다. 선생은 혈액 수분에 관한 비교 생물학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자신의 기본 연구의 틀을 비교생물학적 연구를 통한 진화에 관심을 갖고 이를 평생 추구하게 되었다.

1941년 선생은 경성제대의학부에서 나가사키(長崎)의과대학으로 옮겨 연구한 끝에 박사논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결핵에 걸려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 강원도 평강에 있던 경성제대 부속 평강고지요양소에 옮겨 2년 동안 요양과 함께 환자를 맡아 진료도 하면서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직후 선생은 경성대학 의학부 부장으로 부임한 윤일선의 요청으로 경성대학 의학부 생화학 교수직을 맡았다. 그러나 광복 직후 대학에는 연구를 위한 충분한 실험기구 등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은 주로 경의전, 여의전, 광주의대, 이화의대의 생화학 강의를 시작했다. 선생은 이를 통해 후학 교육에 힘쓰는 한편, 생화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대한생화학회(현재 대한생화학·분자생물학회)를 발족시키고 초대부터 13대(1948∼61)까지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가까스로 부산까지 피난했지만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선생에게 프랑스 초청 유학생 모집공고가 눈에 띠어 응모하여 제1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말 나카무라가 다녔던 바로 그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의 열정과 부지런함 그리고 집념은 파스퇴르연구소에서도 십분 발휘되어, 실험실에서 하루 종일 실험에 집중하여 많은 프랑스 동료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 결과로 DNA 구조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병원균의 DNA계통 분석 등 훌륭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3년 반 동안 이렇게 연구한 결과 그는 마침내 각종 세균 63종에 대한 DNA 염기조성을 균주의 종류별로 분류해 냈다. 이로서 진화적 과정에서 세균의 생물계통적 분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였으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파리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이기영은 3년 반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모교에 돌아왔으나 선생이 당면한 연구 환경은 너무도 열악하였다. 선생은 최소한의 필수적인 실험기구와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1959년에 이르러 비로서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몰두했던 자신의 실험을 재개할 수 있었다. 선생은 1970년대 초까지 동식물 66종의 DNA 염기조성을 분석했고 논문도 많이 발표했다. 정년을 3년 앞둔 1976년 비로서 최신 실험기구와 분석장치가 마련되어 좋은 환경이 되었고, 선생은 이로써 후학들에게 좋은 연구 환경을 만들어 주고 교실을 떠났다.

1979년 8월 서울의대 교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이기영은 오로지 DNA분석과 강의에만 몰두했다. 대한생화학회 회장을 제외하고는 선생이 행정직이나 보직을 맡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학자는 행정직을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학자로서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기영은 80세인 1994년까지 영남의대 교수, 인제의대 유전공학연구소장 등으로 연구와 강의를 계속했다. 1989년 선생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이기영은 철두철미하게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칠순을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한국 최고 수준의 연구에만 몰두한 선생은 2002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집필 : 지제근(서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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