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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방문 그리고 숨은 이야기
가정방문 그리고 숨은 이야기
  • 의사신문
  • 승인 2012.03.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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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영 <임선영산부인과>

임선영 원장
40여 년 전 꽃샘추위가 한 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뜻밖에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내게 알려 왔다.

초등학교 시절엔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학기 초엔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집도 말끔히 치우고 선생님 접대용으로 카스텔라를 따로 준비하곤 하셨다. 우리 형제들도 부드러운 풍미의 귀한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선생님께서 방문하는 날에는 같이 들떠 있었다. 형제가 많은지라 어떤 해는 이틀 걸러 연속으로 행운이 돌아오는 적도 있었다. 작은 소도시라 걸어서도 가정방문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옮겨와 배정받은 중학교는 집에서 큰길까지 20분을 걸어 나가 또 버스를 40분 정도 타는 거리의 학교였다. 가정방문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거리였다. 당연히 가정방문은 없었고 대신 학부모가 학교를 방문하여 상담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학기 초였다. 새 담임선생님은 작달막한 키에 선한 외모, 함경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시는 수학 선생님이셨다. 갑자기 나를 부르시더니 토요일에 제일 먼저 우리 집 가정방문을 오시겠다는 것이다. 1학년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가정 방문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 비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왜일까? 놀라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있는 집안도 아닌데…. 어머니는 학교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재차 물으셨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더욱이 학기 초이지 않던가. 학기 중반이라면 사복 입고 19금 영화관에 출입하였다든가 대중들이 가는 야구장 같은 곳에 교복 입고 갔다가 훈육주임에게 걸렸다든지 하는 사건들이 있을 법도 했다.

아직 봄이 저 멀리 있는지, 바람이 몹시 차가운 날이었다. 어머니를 쳐다보는 선생님의 표정이 반가운 기색이다. 그래 나쁜 일은 아닌가 보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차 한 잔과 마주한 채 한참을 이야기하셨다. 문틈으로 간간이 웃음소리도 흘러나오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선생님을 골목 밖까지 어머니와 함께 배웅해 드렸다. 흡족한 표정으로 어머니께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어머니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운을 떼셨다.

“네가 문제가 아니라 첫사랑을 찾으러 온 게로구나” “첫사랑?, 어머니가? 설마…?”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를 제출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집이 자가인지 셋집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가계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부모 형제는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 등등 적는 난이 여러 칸 있었다.

어머니의 여고 동창생이 선생님의 첫사랑이었던 거다. 담임선생님은 어머니 이웃의 남학교에 다녔고 여고 동창생과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선생님의 첫사랑이 어머니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학사일정에도 없는 가정방문 일정을 잡으셨던 거다.

반듯하고 정확한 수학을 담당한 담임교사의 첫사랑 이야기는 가슴에 꼭 묻어두었다. 흉 될 일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고교졸업 20주년 기념모임엔 재학시절 은사님들도 거의 다 오셨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뒤 그 자리에서 그 선생님은 환갑도 안 된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전해 들었다. 그때의 막막함이란? 마치 나의 첫사랑이 먼저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년 같은 설렘으로 우리 집 앞 골목으로 들어오시던 그날의 모습이 선연하게 겹쳐졌다.

중년의 나이쯤 되면 누구나 첫사랑이 그리워진다든가. 시인 김기림은 소년시절을 회고하며 그의 산문시 `길'에서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고 그렸다. 선생님도 지난 한 세월 속에서 그냥 잃어버렸던 거였을까? 아니면 당신 인생의 잃어버린 한 조각 퍼즐로 남겨두었던 거였을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다림으로 전쟁 후의 고단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을까?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설렘,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나래가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나보다.

임선영 <임선영산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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