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생화학자이자 르네상스인 - 이근배
생화학자이자 르네상스인 - 이근배
  • 의사신문
  • 승인 2012.03.15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생화학회 창설 및 미술고전 번역에도 큰 기여

이근배(李根培)
무사(無蓑) 이근배(李根培)는 생화학자이지만 미술고전(古典)의 번역가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14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에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렸을 때 평양고보(平壤高普) 합격 기념으로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바이올린으로 음악공부를 하고 또 누구 지도를 받은 일 없지만 그림을 잘 그렸다. 1936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소아과교실 부수(副手)로 근무한 다음, 1938년에 일본 나가사키(長崎) 의과대학 약리학교실에 유학 가서 1944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찍부터 한국학(韓國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일본 유학시절 시간만 있으면 고서점(古書店)을 다니며 한국의 언어·문학·역서·민속 종교 등 각 분야의 서적을 구입하였으며, 1940년경부터 낮에는 의학을 연구하고, 밤에는 하숙에서 프랑스의 Maurice Courant교수의 저서 `한국서지(韓國書誌, Bibliographie Coreenne)' 5권을 번역하여 4년 만에 원고지 8000매의 대작업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얼마 후 평양경찰서가 그의 집을 수색하여 장서 2 트럭분을 압수해 갔다. 일본에서 급보를 받고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일본 주임교수의 도움으로 중국 천진(天津)의 프랑스 조계(租界)내에 있는 천주교 신부댁에 피신하여 거기에서 4개월 후에 광복을 맞았다. 그는 뒷날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일본 유학시절을 가리켜 그의 `질풍노도' 시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광복을 맞이한 그는 이듬해 귀국하여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필두로 국내의 여러 대학(이화의대, 전남의대, 중앙의대, 조선의대)과 한국원자력연구소 생물학연구실에서 생화학 주임교수를 역임하였다. 한편 그는 20세 시절부터 프랑스에 유학 가는 것이 큰 꿈이었는데, 이 꿈을 40세가 넘은 1956년에 실현하였다.

그가 전남대학에 재직 중일때 마침 광주에 UN 요원으로 와 있던 프랑스인 의사 Malaterre와 친교를 갖게 되어 그의 권유로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소르본느 대학에서는 Le Breton교수 밑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Le Breton은 당시 프랑스 국립암연구소 부소장을 겸하고 있었으며 인자한 여교수로 그에게는 각별한 호의와 편의를 제공하였다. 덕분에 그는 용돈에 부족함이 없었고 취미인 고서점을 찾아 다니며 귀중한 문헌을 적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의대와 미국 하버드의대 유학을 마치고 1959년 귀국하였는데 이 때 구입한 고전작품이 후일 번역하게 될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 (美術家傳)' 이다.

이탈리아에서 단테의 신곡 다음으로 꼽히는 소중한 고전작품인 이 책은 르네상스시대의 미술가, 건축가, 조각가 등 예술가 200명의 인간성과 작품을 펼쳐놓은 전기(傳記)로 450년 전에 저작한 명작품이다. 이 책은 모두 6권으로 그 양이 방대하고 난해하여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영미독의 3국에서만 번역되고 세계 제일의 번역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에서도 번역을 못한 처지였다. 선생은 대담하게도 이 난업(難業)에 뛰어들어 20년간의 각고 끝에 원고지만도 18,000매가 넘게 완역하였다. 1978년에 번역을 끝냈으나 출판을 맡아주는 출판사가 나서지 않아 원고를 8년간이나 낮잠 재워 오던 중 1986년 예술계에 기여한다는 탐구당의 호의로 세권으로 분책 (分冊)하여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한줄의 글이라도 써야 잠이 온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일까? 선생은 또 프랑스 박물학자 파브르(1823∼1915)의 `곤충 이야기'를 70이 넘은 고령에 번역을 시작하여 전(全)10권을 10년 안에 끝낼 예정이었으나 몸이 쇠약해지고 시력과 기억력이 급속히 나빠져 5권(원고지 9000장)만을 번역하고 나머지는 외국어대학 안응열 교수와 국민대학 이가형 교수에게 맡겨 1992년에 완역하였다.

광복 후 의사출신들이 만든 의학협회 산하의 대한생화학회는 의사출신이 아닌 생화학자가 점점 더 많이 배출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정(正)회원으로 영입하지 않고자 하였다. 선생은 2년 동안 의학협회와 교섭을 벌였으나 완강하게 반대하므로 결별할 수 밖에 없어 1966년 한국생화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모든 생화학자들을 규합하였다. 그 후 한국생화학회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는데, 1990년에는 우리나라 생화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과 생화학관계 친구들이 무사기금(無蓑基金)을 만들어 무사상을 제정하고 매년 국내외 학자들을 초청하여 기념강연을 베풀고 있다.

선생의 생애는 한마디로 다재다능, 주경야독(晝耕夜讀), 집념, 그리고 인화(人和)가 바탕이 된 생화학자이자 르네상스인의 삶이 였으며, 후학들에게도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집필 : 이민화(전남의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