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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메스, 한 손에는 펜 - 김성진
한 손에는 메스, 한 손에는 펜 - 김성진
  • 의사신문
  • 승인 2012.03.0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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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출신 첫 의학박사, 행정·정치에도 일조

김성진(金晟鎭)
김성진(金晟鎭)은 김서규(金瑞圭)의 아들로 1905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한제국기인 1903년 외부(外部) 주사로 시작해 일본강점기에 전남도지사, 전북도지사, 경남도지사까지 역임했다. 김성진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가려고 했었지만 경성제국대학이 개교될 것이라는 소식에 마음을 바꾸어 경성제대 예과 1회로 입학하여 1930년 다른 12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는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오가와 시게루(小川蕃) 교수가 이끄는 제2외과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2외과에서는 오가와 교수의 관심사인 장폐색증에 관한 연구가 한창이었고, 김성진도 관련한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36년 `장폐색시 소화액 분비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주 논문으로 한 의학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였다. 경성제대 출신 한국인 최초로 받은 의학박사학위였다. 이 연구는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왕겐스틴(O. H. Wangensteen) 교수의 장폐색에 관한 저서에도 인용되었다.

당시 한국인 의학자들은 아무리 우수해도 일본인들의 견제와 차별로 국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김성진은 제2외과 조수로 재직하던 1934년 무렵 틈을 내어 경성여자의학강습소에 출강하여 무보수로 외과학을 가르칠 정도로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이었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193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잠시 출강한 것을 제외하고는 교직을 단념하고 중구 서린동에 김성진외과병원을 개원했다.

김성진은 한국인 의사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단합하는데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30년 한국인 의학자들이 조직한 조선의사협회의 창립 당시부터 1939년 해산 당시까지 경리부 간사로 활동했으며, 개업 이후에는 한국인들의 지역 의사단체인 한성의사회에도 1941년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건국의사회(회장·이용설)의 총무로 활동하며, 1945년 결성된 조선학술회의 상임위원, 조선의학연구회의 위원,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의 의료정책 자문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경성대학(광복 직후 경성제대의 개칭) 의학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부임했다. 이어 1947년에는 조선의학협회의 상임이사가 되었으며 조선보건후생연맹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 때 김성진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여 북한군에 징용되어 구호병원 의사로 일하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이후 전쟁 중 육군군의학교에서 단기 훈련을 받은 뒤 수도육군병원 외과부장, 수원야전병원장을 역임했으며 1953년에는 미국 브루크육군병원에 연수를 다녀온 뒤 육군본부 의무감실 의무과장 겸 외과 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군진 외과의학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1955∼56년에는 서울의대 제4대 학장으로 잠시 재직했으나 다시 학창을 떠난 그는 1957년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1960년 국제외과학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60년 4.19혁명 당시 허정 과도내각이 수립되면서 보건사회부장관으로 발탁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63년에는 공화당 중앙위원회 의장과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으며, 다음해 공화당 원내총무와 서울시지부 위원장을 맡았다.

1966년에는 민주공화당 당무위원과 서울시지부 제1지구당(종로)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경성제대 1회 동기생인 신민당 당수 유진오에게 패배한 뒤로는 정계를 떠났다.

학창시절부터 김성진은 외과의사 뿐만 아니라 글쓰기와 음악, 승마 등 다양한 방면에 소질을 보였다. 특히 꾸밈없고 자유분방하며 솔직한 그의 글 솜씨는 어딜 가나 발휘되었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 강사시절에는 학생들의 연극 대본을 직접 써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경성제대 학보와 매일신보에 당시 학위제도를 논박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경성제대에 시말서까지 쓰기도 했다.

신문과 잡지에도 의학 분야에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글이 실린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그의 자질은 이후에도 의사들의 심정을 사회에 대변하고 사회와 의료계 사이를 소통시켜주는 역할을 맡는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91년 87세로 별세한 김성진은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흉부외과를 전공한 장남 김시한(재미) 과 장녀 김정한(방사선과 전공, 재미)이 의업을 이었다.

집필 : 이흥기(한신대 국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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