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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이비인후과 의사 - 박계양
최초의 이비인후과 의사 - 박계양
  • 의사신문
  • 승인 2012.02.2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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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민족의 아픔 치료·의사단체 창립 주도

박계양(朴啓陽)
동계(東溪) 박계양(朴啓陽)은 1882년 경기도 양주군 누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뜻한 바 있어 상경하여 친척집에 머물며 신학문을 공부할 길을 모색하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겠다는 그의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산수와 일본어 등을 준비하여 의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1904년에 입학하였다. 그는 3년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 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대한의원에서 임상경험을 쌓다가 흥미를 느끼던 이비인후과를 더욱 깊이 공부하기 위해 1912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이비인후과학 교실에 유학하였다. 일본에서는 약 3년간 공부를 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총독부의원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병원에 근무하기 싫어 사직하고 개업했다. 처음에는 자본주와 동업하여 인사동에 한양의원을 개업했으나 1년 후에 낙원동으로 옮겨 독립적으로 병원을 지어 개원했다.

당시 개업가에서는 아직 전문분과가 확립되어 있지 않던 때이므로 그는 다양한 환자를 보았지만 이비인후과 전문을 내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비인후과 개업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개원의로서 성공적이었는데 북촌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 중에 그의 단골이 많았다.

박계양은 성공적인 개업의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였으나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다. 정구충의 회고담에 따르면 학생시절 박계양의 병원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점심식사의 반찬이 오이지와 새우젓 달랑 두 가지여서 과연 이것이 장안의 일류 의사의 점심상인가 하고 놀랐다고 한다. 이에 박계양이 우리가 일본사람보다 더욱 절약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해서 정구충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개업의로 지냈지만 당대의 저명 인사들과 폭넓게 교우했다. 그의 병원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사랑방의 역할을 했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나 그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에 앞장섰다. 한번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가 상해에 독립군 자금을 보내었다는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을 도와주어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재가 났을 때는 이재민들을 무료 진료하는 봉사활동을 폈다.

박계양은 사회적인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조선인들의 의사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5년 조선인 개원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한성의사회를 만들었을 때 박계양은 발기인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1924년에는 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1930년 주로 학교에 있던 조선인 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사협회를 조직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간사장을 지냈다. 그밖에 그는 1916년부터 진명학교의 교의로서 은퇴할 때까지 봉사했고 휘문보통고등학교에서도 10년간 교의로 봉사했다.

박계양은 61세가 되던 1943년 배화중학교 이사에 취임하면서 병원 문을 닫고 은퇴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7년에 창립된 대한이비인후과학회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박계양은 은퇴 후에는 한복을 주로 입으며 그가 존경했던 8대조 박세당과 같이 유유자적하며 독서와 서도의 생활을 즐기다가 1970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집필 : 여인석(연세의대 의사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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