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차종 이야기 - B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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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2.02.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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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시장 노려 명품 만든 딜러 `맥스 호프만'

Max_Hoffmann
필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몇 있다. 재벌의 총수이거나 기업을 만든 사람들보다는 조금 별난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는 알렉스 폰 팔켄하우젠 같이 BMW의 심장을 만든 엔지니어이자 레이서인 사람도 있고 맥스 호프만(Max Hoffman·사진)같이 비싼 차라기보다는 특별한 차들을 다룬 딜러도 있다.

호프만은 1950년대에 유럽의 차들을 미국에 소개했다. 당시 미국은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로 GM 같은 회사의 전성기였다. 호프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미국에 와서 사업을 한 사람이다. 호프만은 뛰어난 안목으로 유명했고 신사중의 신사로 알려져 있으며 거래처와 악수를 하면 계약이 성립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고 사업을 한다는 것이 황당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어떤 업종에서는 관행이었다. 부동산 사업가 트럼프가 티파니의 사장과 계약서를 쓰려고 하자 티파니의 사장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는 트럼프의 자서전에 나온다. 그 정도로 신용이 좋았다.

호프만은 1904년에 태어났다. 집안은 재봉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호프만은 자전거를 만들어 자전거 레이스에 출전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모터사이클에 뛰어든다. 1930년에는 자동차의 딜러로 변신하여 미국과 유럽의 차들을 거래했다. 볼보, 란치아, 롤스로이스 그리고 미국의 차들을 모두 거래했고 1941년 미국에 건너갔다. 이때는 보석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전후가 되자 자동차 딜러의 세계에 재진입할 수 있었다.

호프만은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유명한 모델인 벤츠의 300SL은 호프만이 제안한 설계대로 만들어졌다. 엔진의 출력을 높이고 무게를 가볍게 만든 300SL은 사실상 도로를 달리는 레이싱카였고 별로 알려지지 않던 회사 벤츠의 이미지를 높여주었다. 걸윙도어의 300SL은 어디에 가나 눈에 띠는 존재였다. 1400대 정도가 팔렸지만 당시의 미국의 평범한 차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감이 있었다.

포르쉐 역시 호프만의 신세를 졌다. 포르세 엠블럼은 1952년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탄생했다. 포르쉐를 미국 시장으로 처음 수입한 맥스 호프만은 미국의 자동차들은 모두 엠블럼을 가지고 있다는 시장의 특성에 따라 포르쉐에 엠블럼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페리 포르쉐 박사(Dr. Ferry Porsche)는 그 자리에서 냅킨에 포르쉐 엠블럼의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포르쉐 엠블럼의 시초라고 한다.

포르세 356은 포르세 최초의 양산차였다. No. 1이라는 모델이 1948년 생산된 후 1964년까지 생산됐다. 호프만은 미국에 들어오는 356에 포르세의 경영진이 구상하던 것보다 더 저렴하고 운동성이 좋은 차를 제안했다. 356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포르쉐 356은 캐딜락과 같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성공적이었다. 호프만이 제일 관심을 가지고 제안했던 차종은 스피드스터였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에 들어오는 폭스바겐의 수입업자였고 그외에도 많은 유럽차들의 수입자였다. 도저히 미국시장에 맞지 않는 차가 있으면 뛰어난 미캐닉들을 시켜 차를 직접 개조하기도 했다.

BMW역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호프만이 유일한 수입업자이자 공급자였다. BMW는 사실 쓸 만한 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수입이 늦은 편이었다. BMW 1500과 2002 같은 차들이 먼저 수입되었고 나중에 7시리즈의 시작인 바바리아를 수입했다. 1968년의 BMW 2002는 강한 인상을 남겨 whispering bomb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의 차들보다 운동성이 좋았으며 사람들은 BMW의 핸들링과 주행감각에 매료됐다. 그리고는 모터크로스, 랠리, 투어링에서 BMW 2002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안정성도 좋았다. 그만큼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됐다.

7시리즈의 원형인 바바리아가 미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대형차라는 이미지보다 잘 달리고 연비가 좋은 차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 당시의 미국의 차들은 커다란 바디와 엔진을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둔했다. 이 차는 2500cc 뉴식스(new six) 모델에 2800cc 엔진을 단 것으로 미국에 수출되는 모델만 그랬다. 호프만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70년대 초반에 5000달러 정도로 저렴하게 책정된 가격에 팔렸다. 바바리아라는 이름은 이 차가 벤츠와 마찬가지로 독일 태생이라는 것을 연상시키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호프만의 작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많은 유럽차들이 호프만을 통해 미국에 전해졌다. 일부는 굴절됐다고 보면 된다. 호프만은 차가 미국 시장에 맞지 않으면 계속 새로운 주문을 내거나 직접 고쳤다. 호프만의 손을 타지 않은 차는 페라리 정도라고 보아도 된다(페라리는 초반에 벤츠 300SL과 힘겨운 경쟁을 했다. 페라리 딜러인 Chinetti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적어보고 싶다).

나중에 호프만의 사업은 자동차 회사들이 본격적인 영업회사들을 만들면서 축소됐다. 하지만 호프만의 관점은 예리했고 그의 제안은 상당히 유효적절했다. 유럽의 자동차들이 미국에서 니치 마켓이었던 시절 고급 `나까마'라고 할 수 있는 호프만은 성공과 명예를 모두 얻었다. 당연히 사후에는 미국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까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작은 니치마켓에서 강력한 딜러가 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잡스도 마이크로 컴퓨터라고 하는 작은 니치마켓에 애플 II를 들고 나오면서 성공했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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