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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산행기
해남 두륜산 산행기
  • 의사신문
  • 승인 2012.02.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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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민관 강동·노민관가정의학과의원장

노민관 원장
일상의 고단함 잊게한 `다도해 절경과 남도의 맛'

12월3일 오후 5시30분. 압구정 신사공원 앞에서 드디어 해남을 향해 출발.

서울시의사산악회 훈련팀에 들어와 처음으로 떠나는 박(泊) 산행이다.
4년 전 동네 후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오른 검단산이 인연이 되어, 주말마다 산행한 지 벌써 200주 이상이 되었으니, 200∼300회 이상 산에 갔으련만, 박 산행은 덕유산, 설악산, 지리산 이후 네번째인 셈이다. 당연 가슴이 설레인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바깥 바람 쐬러 나가자고 보채는 아이처럼 웬지 모를 자유를 느끼는 건 비단 나뿐일까?

발걸음도 가볍게 약속 지점에 도착했으나, 목적지가 땅끝 마을 해남!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온다. 밥을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도착 후에 먹기에는 너무 늦고, 도착 전에 먹는다면 고속도로 휴게소일 터. 아! 집밥이 좋아 집에만 가면 밥 타령인 내가, 아무리 산행이 좋아도 집 떠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때우기는 너무도 아까운 토요일 저녁 아닌가?

이런 나름의 민생 고민에 빠져 있을 즈음, 갑자기 치킨배달 오토바이가 “배달왔습니다” 소리치며 생뚱맞게 바로 앞에 선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밖에 없는 공원 앞 도로변. 그제야 김진민 고문님께서 주문하신 버스내 간식이라는 걸 알아차리곤 안도의 한숨!

“저녁은 없어도 간식이 있으니, 게다가 반주로 소주도 준비하셨다니!” 조금 전 사온 책의 부제가 딱 맞는 상황이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數)! 경험많은 고수는 역시 다르구나!

버스에 올라 치킨과 소주를 기다리며 다시 여러 고수들의 활약상을 접하게 된다. 직접 요리해온 두부김치와 각종 안주, 다시 양주까지! 소주도 생각보다 충분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밥먹을 생각은 꿈도 꿀 필요가 없게끔 고수들은 확실하게 준비들을 해오셨다. 이젠 오히려 내일 산행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역시 고수들이었다! 더 이상 취하면 안될 만큼 되었을 때 판은 마무리되고 어느덧 해남이다.

숙소인 우수영 유스호스텔 바로 앞에 있는 울돌목(물살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앞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지략에 다시 한 번 경탄을 금치 못하고, 컵라면과 마지막 전의를 불사를 실탄을 장전하고 숙소로 향했다.

대학생때의 MT 이후로 이렇게 컵라면 국물을 앞에 놓고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워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60도 진도 홍주 한 잔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새로운 추억의 기억 한 장이 사진처럼 내 머리 속 HDD 한쪽에 저장됐다.

유스호스텔 바로 앞 기사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역시 남도 1번지라 쟁반에 실려온 반찬은 20여가지에 달하고, 맛도 다들 기가 막혔다. 좀 더 다양한 메뉴를 병행해서 같이 주문해 먹었으면 어땠을까? 같은 값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볼 기회를 누릴 수 있었을텐데…. 20여명의 인원이 여러 메뉴를 시키기 미안하다는 배려심!

“다양한 메뉴보다 오히려 더 짠한 인간미(人間味)가 더 맛난 것 아닌가” 자족해본다.

대흥사 입구에 도착하여 두륜산을 바라보며 단체사진을 한 컷. 입구에 서있는 서산대사의 싯귀가 덜깬 잠을 위로해주는 듯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인이 나그네에게 꿈이야기하고
 나그네도 주인에게 꿈이야기하네
 지금 꿈이야기하는 두 사람 다
 역시 꿈속에 사람이라네

대흥사를 지나 어느덧 이마에 땀도 맺히고, 남아있던 취기도 가실 즈음 과묵한 견공 2마리가 지키고 있는 북미륵암에 도착했다. 국보 308호인 마애여래좌상이 용화전 안에 모셔져있다기에, 호기심에 빼곡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려니 아래 암자에 계신 처사님이신가 무어라 호통을 치신다.

잠겨있지 않은 걸 보면 열지 말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낯선 우리로선 그저 문열지 말라는 말인가보다 할 뿐. 얼핏 보아도 국보급 유물은 맞아 보인다. 머금은 미소와 여래좌상의 자태가 범상치 않다.

식당에서 떠온 물이 동이 나 암자에서 물 공양 좀 할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가야할 것 같다. 좀 더 친근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면 용기를 내어보았을 터인데. 수도 중인 스님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하기로 했다.

약 30분 정도 더 올랐을까. 고계봉과 노승봉 사이. 헬기 착륙장이 있는 넓은 평지에 도착했다. 아마 오심재인가 보다. 일부러 만들지 않고도 이렇게 넓은 평지가 산위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면적. 4년 전이던가, 여름 휴가때 케이블카 타고 올랐던 고계봉 그 때는 산을 다니지 않던 때라 케이블카에서 고계봉까지 오르는 계단도 힘들게 느껴졌었는데…. 이 나이에 성장한 것도 있다고 생각하니 웬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온다.

노승봉, 가련봉은 대흥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누워있는 부처님이 손을 마주잡고 있는 듯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막상 코앞에서 바라보니 정상까지 오르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경사가 너무 급하고, 바위만으로 되어있어 암벽등반이 아닌 트레킹으로는 우회해야할 코스로 보인다. “정상을 못 밟아 아쉽지만, 우회하겠지” 생각하며 봉우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역시 흙길로 우회하는 코스로 시작된다. 바위산에 있는 흙은 더욱 반갑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턱쯤 올랐을까, 어느덧 흙이 보이질 않는다. 익숙치않은 자일과 발판. 국립공원이 아니어서 친절한 등반로가 아니다. 자일도 밧줄과 철로 만든 봉이 번갈아 있어 안정감이 떨어지고, 발판도 폭이 좁아 두 발을 한꺼번에 밟기가 여의치 않고, 한 발씩 발판을 디디고 오르기에는 발판 사이의 높이가 너무 높다.


대흥사에서 대륜산 바라보며 안전산행 다짐하며 힘찬 발걸음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급한 경사로 가련봉으로 우회길 선택해
너덜지대·절벽길 등 난코스 거쳤지만 산행의 맛 제대로 느껴



다리가 짧은 사람들은 정말 난감, 나같이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온몸으로 오를 수 밖에. 그렇지만 노승봉까진 괜찮은 편이었다. 마주 보이는 고계봉의 케이블카가 전혀 부럽지 않았고, 오히려 바람은 시원했다. 신동엽 샘의 DSLR 카메라도 물만난 듯 포토존에서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가련봉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이 가련해서 가련봉이 되었을까? 노승봉을 내려갈 때부터 앞서가는 사람들도 없는데 정체가 시작되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 “알아서 내려오세요” 살아서 내려오라는 말보다 더 무섭게 들린다. 실제 자일을 잡아보니, 누가 도와주기도 어렵게 자리들이 좁아 말 자체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다음에 나는 “조심해 내려오세요”라고 해줘야할 것 같다. `알아서' 와 `살아서'는 한 글자 차이여서 잘못 듣기도 쉽거니와 괜히 주눅부터 들어 몸이 더 굳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역시 고수들이었다. 아무도 이런 말에 아랑곳없이,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 나는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한 번 찧었다. 무사히 가련봉 정상을 밟았다.

가련봉을 내려오는 길도 결코 만만치 않은 난코스였다. 서북능선보다 더 심한 느낌의 너덜지대도 있고, 어느 고관대작의 방문이 있었으리라 싶은 계단길(아마 그 방문 이후에 만들어졌을 성 싶은 느낌이 들었다) 아래 펼쳐진 원래의 절벽길.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정도까지 봉우리를 내려오니 꼬르륵 소식이 오고, 안성마춤 지점에 만일재가 나타난다. 참으로 산은 적절한 시점에 적당한 쉼터를 너무도 친절하게 베풀어준다.

이제 부처님 머리에 해당하는 두륜봉만 오르면 하산 길만 남은 터라, 대흥사 초입에서 사온 막걸리를 풀고 두리번 고수님들의 참거리를 기웃거린다. 역시 어제 내놓은 것이 다가 아니었다. 언제 끓이셨는지 커피까지, 박 산행이라 당연히 보온병은 두고 왔는데.

숙소에서 더운 물을 준비하신 모양이다. 어제 그렇게 많이 풀어놓으시고도, 고량주를 한 병 꺼내시는 고문님. 역시 고수다! 적당한 시간이 흘렀을까. `출발 몇 분 전' 같은 고지도 없이 홀연히들 자리를 차고 다시 남은 길을 향해 출발!

아마 그간의 산행에서 암묵적으로 약속한 `적당한 시간'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초짜인 난 일행에서 열외되지 않게 허겁지겁 짐을 챙겨 넣느라 배낭 크기가 아까보다 두 배는 되는 듯 느껴진다.

두륜봉은 노승봉, 가련봉과는 느낌이 판이하다. 일단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고, 바위 봉우리로 보이지만 흙이 많다. 하산길은 아예 흙길이다. 아침에 오심재 쪽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이 “이 쪽으로 오는 분들도 있네!” 하면서 의아해 하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산행코스에는 분명 우리가 온 길이 제 1 등산코스로 되어있지만, 5시간 산행시간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난코스를 모두 통과해야하는 그야말로 선택권이 없는 코스인데 반해, 두륜봉이나 만일재로 오르는 코스는 다음 산행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약간은 자유로운 코스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상인 가련봉을 오르는 코스도, 두륜산 봉우리 중에서는 유일하게 계단이 설치되어있어 안전산행 코스로 좋다.

하지만, 산행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역시 오늘의 1코스가 제격인 듯하다. 봉우리 마다 탁 트인 조망!

산과 들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바로 앞에 펼쳐진 다도해의 전경을 이렇게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약간 쌀쌀하다 싶은 초겨울 바람마저 눈앞의 전경과 어울려 시원하게 느껴지는 곳. 여름이면 송송이 맺힐 이마의 땀방울이 이 바람 덕분에 시원히 마를 것이라 생각되는 곳. 시간만 더 허락된다면 고계봉에서 향로봉에 이르는 주능선을 다 느껴보고 싶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이 정도에서 정리하는 것이 정도일 듯.

다들 묵묵히 아래로 아래로만 발길을 옮긴다. 하산길에 남미륵암, 일지암, 천년수를 못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서산대사, 초의선사의 기를 듬뿍 받고 대흥사를 나서려는데 법구경 한 구절이 내 발걸음을 멈춘다.

 피곤한 사람에게
 갈 길은 멀고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듯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겐
 아 아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아 아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2012년이라니. 매 1년이 이렇게 짧고 가깝게 느껴지는 우리들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기사님의 안내로 해남 맛집 천일식당에 들러 산행 마무리 겸 점심을 들었다. 상도 없는 맨 방에 20여명이 아무 것도 없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적잖이 재밌어 보였다. 역시 음식은 남도랑께∼

그날 밥도둑 여러 명 잡혔죠 아마. 남도 1번지 해남에서의 박 산행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도록 cache에 넣어야겠다.

노민관 <강동·노민관가정의학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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