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59 (금)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을 옆에 두자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을 옆에 두자
  • 의사신문
  • 승인 2012.01.09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숙희 <여자의사회 총무이사>

김숙희 이사
“반대의견 있으십니까? 없으면 통과합니다. 이의 없으시면 `예' 하시고 아니면 `아니요' 하십시오. 예! 모든 안건이 통과 되었습니다”

이렇게 회의가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끝나면 제 시간에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마냥 흐뭇하다.

“이의 있습니다. 결산 부분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비비로 책정한 부분을 사용했다면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용했는지 명시해야지 그대로 예비비로 지출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내년 예산 또한 예비비 예산이 많은데 그것도 가능하면 적절한 항목에 넣어야 합니다”

필자가 참석했던 저녁 회의 중에 한 장면이었고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쪽을 향했다.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는 사람도 있고 `또 저자가 트집이네. 오늘도 제 시간에 밥 먹기는 글렀구나' 하면서 실망하는 얼굴들도 있었다.

저녁 회의를 할 때 식사를 먼저 하고 하기도 하고 회의를 끝내고 식사를 하기도 한다. 식사하면서 한잔 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부분 회의를 먼저 하는 것을 선호하며 또한 배고프면 회의가 논쟁 없이 빨리 끝날 수도 있으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회의를 먼저 하는 경우 반론과 수정 사항이 많으면 참석자들의 성향에 따라 혈당저하로 기력을 잃어 조용해지거나 반대로 배고플 때 인지 능력이 더욱 향상되어 맹렬한 의견교환이 시작되기도 한다.

대부분 회의 때마다 이의제기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영리한 주재자는 회의 전에 미리 의견을 듣고 조율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내색을 않다가 기습적으로 발언을 위한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고 트집을 잡기 위해 준비해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주재자 입장에서도 구성원들도 모두 반갑지 않은 사람이고 발언이다. 이럴 때 반론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결로 일을 처리하면 실수를 할 수 있다. 조언자 혹은 방해자 혹은 트집 잡는 사람들의 의견으로 인해 단체의 사업을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은 원래 바티칸에서 유래한 것으로 교황후보를 반대하는 역할을 맡은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위 악마의 처지를 대변하도록 지명된 이 사제는 교황후보 논의에 균형을 맞춰준다고 한다.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자가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모든 단체는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교황청처럼 누군가 그런 역할을 맡도록 공식적으로 정해놓지는 못하더라도 업무의 진행을 알리는 것 못지 않게 반대자에게 발언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단체에서 이런 반론자의 존재는 의사결정 과정을 좀더 합리적으로 이끌며 실수의 가능성을 줄여줄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의견도 틀릴 수 있지만 반론자가 제기하는 요점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회의를 방해하려는 불순한 경우도 있겠지만 이 또한 참석자들의 인내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의사들의 단체에도 이런 반론자가 꼭 있어야 한다. 지난 6년간 다양한 의사단체의 회의를 참석 혹은 주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살아 역동하는 단체는 이런 반론자들이 다수 있어서 회의시간이 길어지고 회의가 활발하다 못해 싸움에 가까운 논쟁으로까지 진행된다. 배는 고프지만 필자 자신도 회의 주재를 할 때 열띤 논쟁을 부추기기도 하면서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일사분란하게 의견통일이 되는 회의는 참석자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지고는 한다. 어떤 주재자는 임원들의 이견을 묵살해 버리기도 한다. 꼭 검토해야 할 의견인데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고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소통 부재에 독재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단체장은 참석자들의 의견이 스스럼없이 개진될 수 있도록 열려있는 회의를 해야 하며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역할을 하는 듯한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항상 옆에 두어야 한다.

새해 새로 선출 될 우리 의사 단체장들은 이런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할 회원들을 임원으로 다수 선임하고 회의를 할 때 이들의 발언을 적극 허용했으면 좋겠다. 물론 이들을 포용하지만 조율할 수 있는 단체장의 능력이 우선되어야 하겠다.

김숙희 <여자의사회 총무이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