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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거꾸로 사는 맛(?)
세상을 거꾸로 사는 맛(?)
  • 의사신문
  • 승인 2012.01.0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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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박경아 회장
그 할머니의 정확한 나이를 아직도 나는 모른다. 12년 전에도 그 할머니는 쪼글쪼글한 70세쯤 나 보이는 얼굴이었고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니 그 동안에 젊어졌다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그 할머니는 12년 전 내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위해 교리반을 열심히 다닐 때 성당 옆 골목에서 과일을 팔고 있었다. 제대로 된 가게도 없이 함지박에 사과와 귤 정도를 쌓아 놓고 파는 것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거의 매주일 들러 한 아름씩 사가는 단골(?)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 1년이 다가도록 단 한 번의 미소는 커녕 단 한 개의 덤도 주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내가 덤이라도 달라치면 무표정한 얼굴로 살라면 사고 말라면 달라 식의 소위 `배짱' 할머니였다.

그러던 할머니가 언제부턴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년 이상을 꾸준히 한곳에서 매주일 과일을 사니(왜냐하면 그 할머니 과일이 특히 맛이 좋기 때문이었고, 그 이유는 반드시 할머니가 시식을 해보고 합격한 것만 들고 오기 때문이란 것도 후에 알게 되었다) 드디어 `단골'로 인정을 해준 것이다.

일단 단골이 되고 나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귤을 사면 1000원 어치가 다른 곳보다 서너 개는 더 많게 책정되어 있고 거기다가 5000원 어치라도 사게 되면 원 개수 외에 덤을 하염없이 넣고 있어 매번 나는 그만 넣으라거니 할머니는 더 넣겠다거니 하며 실갱이를 하게 된다.

처음 왔던 손님들은 완전히 거꾸로 된 상황을 보는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이곳 강남으로 이사 온 후 예전처럼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갈라치면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새로 나온 과일들을 몇 개씩 맛보라며 주신다. 나 역시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할머니에게 따뜻한 내의를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내 방에 야쿠르트를 배달해 주시는 아주머니도 10년째 단골이다. 너무나도 인상 좋고 마음씨 좋은 이 아주머니는 어쩌다 바빠서 못 먹은 야쿠르트가 너무 오래되면 바꾸어 주게 되어 있다며 수시로 내 냉장고를 점검해 주신다. 어쩌다 게을러 다섯 개씩 모일 때가 있는데 그런 때면 나는 한 번에 다섯 개도 먹을 수 있으니 염려 마시라 하면 언제 이걸 다 먹느냐며 아예 세게는 물러주시고 두 개만 남겨주신다.

나는 웬만큼 오래 되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안 하는 스타일이다. 그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하루만 묵은 것이 있어도 절대로 바꾸어 놓고 가신다. 아주머니와 바꾸자거니 괜찮다느니 하는 실갱이를 하는 것을 본 옆의 사람들은 뭔가 거꾸로 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는 남편의 생일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난후 남편은 선물을 사러가자고 했다. 이미 나는 그에게 선물을 준 터라 도대체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 자기 집에서는 생일날 부모님께 선물을 사다 드리는 것이 전통이란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모님 덕이고 이렇게 잘 길러 주셨으니 새삼스레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두 분이 좋아하실 만한 선물을 사들고 시댁으로 가는 발걸음은 상당히 기분 좋은 것이었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잘 지켜져 나가고 있고 요즈음 같이 점점 부모님 은공은 쉬이 잊게 되고 자기 자식만 위하는 세상에 이 같은 행사는 어른들을 기쁘게 해 드리는 좋은 일로서 좀 더 주위에 많이 알려 이러한 캠페인을 벌려 나가고 싶다.

박경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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