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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여행기 〈상〉
북해도 여행기 〈상〉
  • 의사신문
  • 승인 2011.12.1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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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임 중구 동호의원장

소설 `빙점'의 배경지 북해도 아사히가와에 가다

김태임 원장
미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고 있는 둘째 딸이 학위 논문 자료 수집 차 귀국하여 두 달 동안 같이 지내게 되었다. 아이에게 틈을 좀 내라고 졸라서 가족 여행을 하기로 했다.

8월에 캄보디아 의료 선교 등으로 병원을 자주 비워 마음이 약간은 무거웠지만 시집간 딸과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아, 남편, 딸 규원, 막내아들 동욱이와 같이 북해도 자유여행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여행을 자주 했지만 언어 문제로 자유 여행은 부담스러웠는데, 규원이와 동욱이 일본어를 조금 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북해도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 JR 열차로 두 시간 걸려 아사히가와에 도착해 렌트 카를 빌렸다. 아사히가와는 미우라 아야꼬(1922∼19990)의 소설 `빙점'의 배경도시이자 작가의 고향이다. 미우라는 아사히신문 장편 소설 공모에 마흔 두 살의 늦은 나이로 당선, 신인답지 않은 작품성으로 일본열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박완서 선생이 마흔 나이에 여성 동아 장편 소설 공모에 `나목'으로 등단,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과 유사하다. 중학교 때 빙점을 읽었는데, 아사히가와의 풍성하게 쌓이는 눈, 연습림의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흰수염 폭포
주인공들의 섬세하고 미묘한 심리 묘사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랑, 배신, 복수, 그에 따르는 갈등,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 들을 특유의 여성적이고 유려한 필치로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빙점은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폐결핵과 척추질환으로 오랜 요양원 생할을 하였다.

타계하기 전에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었습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하고 남는 것은 `쌓아온 공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기셨다.

떠나기 전부터 렌트카를 빌리는 경우, 일본의 운전방법이 우리와는 반대여서 걱정을 했는데, 규원이가 자기가 일본어 도로 사인도 읽을 수 있고, 아직 젊어 순발력이 있다고 핸들을 잡았다.

뒷좌석에 앉아서 보자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특히 좌회전, 우회전을 할 때, 우리나라 식으로 운전하면 정면충돌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신호등에 걸렸다 출발할 때 마다, 나머지 세 가족이 “좌회전!! 왼 쪽으로 붙여서 작게, 우회전!! 오른 쪽으로 크게”, 합창을 하다 보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너무 우스워 오랜만에 신나게 깔깔거렸다. 다음 날부터는 남편이 핸들을 잡으니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차분하게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시로가네 온천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면서도 늘어선 자작나무가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지는 해를 받아 은색으로 물결치듯 반짝인다. 신비롭고 하얗게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자작나무는 내가 제일 좋아 하는 나무다. 우리 아파트에 자작나무를 정원에 심고 열심히 가꾸는 게 보기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무를 파 버려, 어찌 되었는가 걱정했는데, 나무가 시들시들 죽어가, 다시 심는다나. 얼마 후 예쁘게 다시 심어진 자작나무를 보고 시집간 딸이 돌아온 듯 반가웠다. 러시아인의 마음에 늘 살아 숨 쉬는 나무, 푸쉬킨이 각별히 사랑하던 나무였다.


미국서 공부하는 둘째 딸 잠시 귀국한 틈 이용 가족여행 결심
우리와 반대인 운전방법에 `우회전 좌회전' 합창하며 신나
잔잔하고 투명한 느낌 가득한 그림 같은 곳에서 사색과 휴식


시로가네 온천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안내받고 보니 엘리베이터 바로 앞, 좀 번잡스러운 위치여서 다른 방 없냐고 물었다니, 여유 객실이 없단다. 여행할 때 마다 방의 전망, 조용한 위치인가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남편의 안색이 좋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화실 다다미방도 정갈하게 널찍하고 창문을 여니 자작나무 숲이 코앞이다. “와! 자작나무 숲이 끝내 주네”하고 외쳤더니 남편의 얼굴이 풀어졌다. 남편은 아들과, 나는 딸과 한 방을 쓰게 되어,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녹차를 마시니 여행의 피곤함이 녹으면서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노곤하고 무거워 움직이기가 꾀가 나서 꾸물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조금만 걸으면 아름다운 온천폭포가 있으니 산책하자고 유혹한다. 오늘도 하루 종일 걸을 터인데 아침을 느긋하게 먹고 모닝커피나 즐기련다고 했다. 그러나 폭포가 시로가와 온천의 포토포인트라는 말을 들으니, 사진이 취미인 나는 귀가 솔깃, 육상 선수도 저리 가랄 정도의 초스피드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이른 아침 속으로 발을 딛는다.

`흰 수염 폭포'는 추운 겨울, 폭포의 윗 쪽부분이 얼어붙으면서 그 모양이 마치 흰 수염같이 보여 붙여진 이름인데, 대설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이다. 투명하게 맑은 계곡에 옥빛 별이 쏟아지면서 무지개 색깔의 거품을 만든다. 사진을 찍고 따뜻한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니, 적요한 아침에 계곡을 감싸는 물소리가 그윽하다. 철분 함유량이 많은 온천이라 물색이 연한 초코릿빛을 띠우면서 달콤하고 부드럽게 피부에 감긴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지난해 아오모리, 아끼다 여행에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심심하고 고소한 명란을 얹어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나서 찾아보았더니 명란이 보이지 않는다. 계절이 아니란다. 오랜만에 생 계란에 밥을 비벼 단무지와 감칠 맛 나는 미소 된장국을 먹고 있자니 소시지를 입에 가득 문 아들 녀석이 “어, 엄마는 미국식 아침 식사를 좋아 하잖아요?”한다. 그러네. 북해도의 청정한 공기가, 자작나무의 싱그러움이 입맛도 바뀌게 하는가 보다. 향이 은근한 원두커피에 신선한 푸딩을 곁들이니 기분 좋은 포만감에 마음이 푸근해 진다.

푸른호수
시로가네에서 남쪽으로 `푸른 호수'가 있다. 호수 주변에 댐이 생기고 자작나무 숲이 물에 잠기면서 참으로 독특한 멋을 풍기는 호수가 만들어졌다. 호수의 물에 다량의 알루미늄이 녹아 있어 생물은 살 수 없다고 하니, 우리들에게 경외감을 동반한 감동을 주는 이 매혹적인 호수가 생물과는 양립할 수 없다니 아쉽다. 연전에 카나다 록키산맥의 페이토 호수를 보면서 장엄한 록키산맥을 뒤로 찬란하게 빛나던 호수가 영혼을 울리는 감동으로 다가온 적이 있는데, 푸른호수도 장관이다. 페이토호수는 맑은 에메랄드색인데, 석회석의 우유빛이 더 해져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기운을 띤다.

`푸른 호수'는 짙은 코발트블루 색으로 차고 투명하면서 맑은 기운이다. 물에 잠겨있는 자작나무의 음영이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 스며들 듯이 아름답게 반영된다. 물에 잠긴 자작나무가 검은 색을 띠며 외로이 생명을 잃어 가는 모습이 종내 안타깝다. 다시 돌아와 다른 계절의 자작나무와 호수를 만나고 싶다. 어떤 모습으로 조우할 수 있을는지 기대해 본다.

북해도 비에이는 역을 중심, 북서쪽으로 패치워크 로드, 남서쪽으로 파노라마 로드가 있다. 이름 자체가 낭만적이다. 파노라마는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패치워크 로드는 위에서 내려다 볼 때 펼쳐진 밭들의 모양이 작은 조각천을 이어 붙여 한 장의 큰 천을 만드는 패치워크처럼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황금색과 녹색의 밭이 빨간색 지붕의 하얀 집과 어우려져 스위스의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김태임 <중구 동호의원장, 전 이화의대 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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