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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의사신문
  • 승인 2011.11.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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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훈 법무부 대구 소년원 의무과장

박송훈 의무과장
출근길에 호박 밭에 들렸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텃밭은 발길이 가는 곳마다 축축한 물기로 얼룩이 지고, 색깔이 바랜 호박잎들은 이미 시들고 있었다. 올해는 애호박이 풍성해서 주위 많은 분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드렸음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젠 끝물이다. 크다만 작은 열매들이 퇴비 밭에 어지럽게 널려있고 쌓이는 낙엽, 소리 없이 만추가 다가서고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했던 것일까?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섞고, 아마도 지난 3월 늦추위가 가시지 않은 직장 담벼락 귀퉁이, 여남은 땅을 일구면서 나눔이라는 작은 소망에서 비롯됨이었으리라. 호박 외에도 무, 가지, 배추가 남아 있으니 아직 끝난 농사는 아니지만 한여름의 땡볕과 모기, 땀으로 범벅이 된 결실이었다. 사서 먹으면 그만일 것을…, 직원들의 농 섞인 진담이 격려로 들렸던가. 아무튼 채소 풍년이었다. 내가 만든 나눔이고,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나눔을 얘기하던 사람이 서울 시장이 되었다. 그가 그리도 비난하던 재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태로 기부 받아 적당히 어디론가 나누어 주고, 아마도 일부분은 스스로에게 보탬이 되었을 터이고… 과거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했던 시도, 이제는 공권력으로 서울 어느 곳의 어떤 동상과 현판에 위해를 가할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저들이 길거리 시위로, 반정부적 소요로 한 시대를 농단해나갈 적에 우리는 묵묵히 공부하고 삶의 전선에서 말없이 힘들게 살아왔다.

파레토의 법칙,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자와 적당히 일하는 자, 그리고 과실만 나누려는 자들이 존재한다. 또한 청부론(淸富論)을 주장하며 축적된 부의 정당성만 얘기하는 자들이 있다. 청빈하지 못한 평등주의자들, 사회적 환원이 없는 자유주의자들, 정치적 위선으로 가득한 지도층, 보편적 복지의 덫에 갇혀버린 하부 민중세계의 이율배반이 사회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먹을 것과 먹는 법만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회, 저녁 식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늑대 두 마리와 양 한 마리가 투표를 한다면, 사회적 자산에 대한 포퓰리즘식 거래의 희생적 결과는 결국 일하는 양들의 몫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적 인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의사회도 대법원 판결에 의해 결국 간선제로 종료되었다. 간선제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원들의 의견 수렴도 없이 대표성 없는 일부 대의원들에 의해 발의가 되고 일방적으로 결정되어진 그들만의 잔치, 올바른 간선제로 나아가려면 대의원 직선제가 해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거리는 플라타나스 잎들의 잔잔한 물결, 외진 담벼락 모퉁이까지 젖어드는 호젓한 만추의 정감, 낙엽을 모아 태우려 한다. 일하는 자의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리라, 내년의 텃밭은 몇 가지 채소로 우리의 식탁은 다시금 풍성해지리라. 서리가 내린 아침의 풍경, 철조망에 기대 오랜 금연 끝에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불을 붙인다.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희망…

호박잎은 시들고, 황량한 텃밭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외침이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전후 독일의 참상과 고통, 부도덕한 사회상을 묘사한 소설이다. 제목을 빌어 왔다.

박송훈 <법무부 대구 소년원 의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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